[Opinion] 문제의 아카데미 수상작, 영화 <그린 북>의 흑과 백 (1) [영화]

글 입력 2019.03.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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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개최된 제 9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의 영예를 만끽하기도 전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작품이 있다. 바로 <그린 북>이다. <그린 북>은 미국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 그의 백인 운전 기사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의 편견을 넘은 우정을 그리는 실화 기반의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주요 3개 부문에서 트로피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린 북>은 그 해 최고의 작품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중의 박수와 호응 대신, 거센 비난의 목소리를 마주해야 했다. 일각에서는 2006년 <크래쉬> 이후 최악의 작품상 수상작이라는 평가도 거세다. <그린 북>은 어쩌다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 그리고 논란의 상황 속, 우리는 <그린 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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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그린 북>의 감독 피터 패럴리(가운데)
출처: 경향신문



필자는 위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총 두 편의 글에 걸쳐 <그린 북>의 흑과 백에 대해 조심스럽게 논해보려 한다. 해당 작품이 '소수자 혐오'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작품의 윤리성에 대한 고찰은 어렵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메세지가 담긴 작품을 바로 알고, 작품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문화 향유자인 우리가 예술을 가장한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이다. 본 글(1편)에서는 <그린 북>을 둘러싼 세간의 논란들을 하나씩 짚어보면서 작품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그린 북>이 오스카의 뜨거운 감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린 북>을 둘러싼 소동의 구심점은 다름 아닌 제작자들의 위선적 태도였다. <그린 북>은 인종차별과 소수자 혐오를 냉철하게 경계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비친 <그린 북> 제작진의 모습은 작품의 따뜻한 메세지와는 정반대였다. 토니 발레롱가의 친아들이자 <그린 북>의 각본을 쓴 닉 발레롱가는 몇 해 전 무슬림을 비하하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SNS에 게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다수의 분노를 샀다.


게다가 작품을 연출한 피터 패럴리 감독도 한 영화 촬영장에서 배우 및 스태프들에게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등 과거의 비도덕적 행실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술 작품이 생산자의 도덕성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독자적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작품의 주제를 고려할 때, 창작자의 도덕적 평판 때문에 <그린 북>이 공분을 사게 된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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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의 각본가 닉 발레롱가 / 출처


뿐만 아니라 <그린 북> 작품 자체도 백인 구원자 서사를 고집한 위선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주관적 해석의 장르인 터라 단언적인 판단을 내리긴 어렵지만, <그린 북>에는 위와 같이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장면들이 꽤 등장한다. 토니가 백인 남성으로서의 권력으로 곤란에 상황에 처한 돈 셜리를 구출해주는 장면들이 특히 그렇다. 편견을 넘어선 우정이 사회적 권력을 이용한 누군가의 일방적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품격 있는’ 평등을 향한 돈 셜리의 치열한 고민은 이내 무색해져버리지 않을까?


또 <그린 북>은 사실 왜곡 논란에도 시달렸다. <그린 북>은 앞서 언급했듯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극본을 집필한 닉 발레롱가는 생전 돈 셜리의 허락을 구한 후 해당 영화를 촬영한 것이라 주장했으나, 셜리 박사의 유족들은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며 반박했다. 셜리 박사가 토니 발레롱가와 실제로는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제작진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유족들에게 전하지도 않은 채 영화 제작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장르의 압축적 특성상 극화 과정에서 스토리의 변형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영화의 핵심적인 인물 관계가 사실과 다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왜곡에 해당한다. 심지어 그러한 영화를 유족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제작하고, 영화가 '감동 실화'임을 내세우며 거짓 마케팅을 한 것은 대중으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불거지는 논란에 제작진은 사과의 뜻을 밝혔으나, “나는 돈 셜리의 유족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는 닉 발레롱가의 당황스러운 발언으로 작품은 또다시 거센 힐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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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의 두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왼쪽)와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오른쪽) / 출처


설상가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오스카의 작품상 수상작 선정 기준 자체를 의심하는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후보에는 <그린 북>과 함께 평단과 대중 양쪽 모두의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 여럿 포진해 있었다. 특히 골든글로브를 비롯한 여러 시상식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와 올리비아 콜맨이 출연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많은 사람들이 수상작으로 점쳤던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영화들 틈에서 <그린 북>이 오스카 최고 상인 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받아야 하는 작품이 받지 못했다”는 대중들의 아쉬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백인 남성 중심으로 진행된 아카데미 시상식이 이제는 ‘인종차별 반대’, ‘소수자 혐오 타파’, ‘다양성 추구’ 등의 사회적 테마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오스카 측이 <그린 북>에 작품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말이다. <그린 북>의 수상이 인종차별을 수단화한 아카데미의 얄팍한 계책일 뿐이라는 의견들 속에, <그린 북>은 부당하게 왕의 자리를 꿰찬 ‘눈엣가시'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그린 북>은 뛰어난 작품성으로 본래의 메세지를 널리 알리기는 커녕, 제작진의 도덕적 태만과 오스카의 아쉬운 선택으로 본디 기대되었던 사회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대중 예술의 사회적 무게를 간과한 <그린 북> 팀이 스스로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그린 북>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어지는 글에서는 작품의 내부적 특성을 파헤치고, 그것의 메세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

영화 <그린 북> 메인 예고편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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