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7. 같은 술, 다른 분위기

글 입력 2019.03.1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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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의 중반, 말라가, 포근



나는 사실 술을 안 좋아했다.


처음 술을 가르쳐준 건 학교에서 만난 언니들이었다. 언니들은 '내 몸은 내가 먼저 챙겨야 한다. 나의 주량의 80% 이상은 마시지 말아라.'라고 알려줬었다. 언니들은 술을 강요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해주었다. 적당한 술과 취기는 맨 정신에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런 분위기라면 술이라는 것이 꽤 괜찮은 친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학교를 벗어나 마주한 술자리들은 참 어렵기도, 더럽기도 했다. 술이 그동안 닫아놓은 마음 속 빗장을 풀어줄 때, 마냥 좋은 것들만 나오는 것은 아니니깐. 술이 들어가면 맨 정신에 나눌 수 없는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맨 정신에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와 행동들도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한 동아리의 선배는 나의 제일 친한 친구가 술을 빼는 것이 예의 없어 보였나 보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그는 나지막하게 내 친구를 불렀다.


"OO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음... 모르겠어요. 어떤 건데요?"

"네 잔이 차있는 거야."


그렇게 그는 건배를 하고 친구의 술잔을 비워 주었다.


"OO아,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제 친구 잔이 차있는 거요..?"

"아니, 네 잔이 비어있는 거야"


그렇게 그는 겨우 비워낸 잔을 다시 채워주었고 내 친구는 그날 꽐라가 될 때까지 술을 마셔야만 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그 장소, 그 장면, 그 대화가 생생히 기억나는 것을 보면 20살 나에겐 이 일이 가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술이 싫어졌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몇몇 사람들은 교환학생을 가면 다들 술도 많이 마시고 클럽도 많이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누군가는 외국에서는 몰래 남의 술잔에 마약을 넣기도 한다며 겁을 주기도 했고 누군가는 외국에선 맥주가 물보다 싸고 맛있는 술도 많으니깐 많이 마셔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원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건 별로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정말 스페인으로 오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술이 많이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 가장 즐겨 마시는 것은 와인과 레몬맛이 강한 탄산음료를 섞어 만든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 여름의 와인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에서 유명한 와인인 셰리와인부터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대표 와인들인 포트 와인과 키안티 와인에 마트에 있는 값싼 양주들까지.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려 하다 보니 술자리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었다. 한 이탈리아 친구의 초대로 처음 보는 친구들이 많은 파티를 갔을 때, 너는 무엇을 마실 거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물 정도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속으로는 이 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걱정과 함께.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누군가 나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를 체감하니 이상하게도 스스로 술에 손이 갔다. 와인과 맥주에 젖어들며 하나둘 깊은 속이야기를 꺼내 놓는 외국인 친구들을 보며 이번에는 나도 좀 취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한 친구는 술의 힘을 빌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기도 했고, 다른 친구는 본인의 관심사인 난민에 대한 내 생각을 물어보기도 했다. 자신의 잔이 비어있어 이를 채우며 한두 번 너도 마실 거냐고 묻는 질문 빼고는 그 누구도 나의 술잔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처음엔 유난히 그 친구들과의 파티 분위기가 좋았던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에 만난 다른 친구들과의 파티도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친구의 플랫에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사 온 술 몇 병과 안주를 펼쳐두곤 지극히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것까지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러한 술자리들을 겪으며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싫어했던 건 술이 아니라

술자리의 분위기였구나.'


술이 있는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도 꽤나 달랐다. 이 친구들 원래 이렇게 진지한 애들이었나? 싶을 정도로 사회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처음엔 유럽인들 사이에서 '진지한 민족'으로 통하는 독일인들만의 특색인가 싶었지만 그도 아니었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외국인 친구들과의 파티에선 항상 사회적인 이슈가 오르내렸다.


"헤이, 진! 실례가 안된다면 북한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 대부분의 한국 청년들은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헤이, 진! 한국은 난민에 대해 어떤 입장이야? 지금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어?"


"헤이, 진! 한국에서도 성평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니? 너의 입장은 어때?"


사실, 처음엔 이 질문들이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한국에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설명하거나 나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기회도 적었고 한국어로 이야기해도 어려운 것들을 영어와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유럽권 국가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은 본인의 국가뿐 아니라 이웃 나라의 역사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아주 해박했다. 하지만 저기 먼 동쪽 나라에서 온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정치인의 이름이 오가거나 난민 정책과 같은 주제로 의견들이 오갈 때면 마치 바르셀로나 축구팀의 티키타카를 보는 듯 정신없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루는 새벽 3시까지 이탈리아의 정치 이야기를 듣고는 기가 빨린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 이탈리아에서 온 플랫 메이트와 밥을 먹다 문득 궁금해져 그에게 물었다. 원래 술을 마실 때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지.


플랫 메이트는 아무래도 집에서 파티를 할 때는 그런 이야기를 확실히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를 할 때, 본인들은 대학교를 다니고 고등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느껴졌다.


유럽의 대학생들은 이러이러한 반면, 한국 대학생들은 이러이러하다고 비교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다. 하지만 외국인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사회에 대한 큰 책임감을 느꼈던 적도 없고, 우리나라의 역사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 파편적인 정보들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의견을 논리적으로 펼쳐본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직접 이런 술자리들을 경험하며 느낀 점은 '이 문화, 참 좋다!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였다.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것보다 더 재미있었고 인상 깊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세계사가 눈 앞에서 펼쳐지는 기분이랄까. 나 또한 한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서로의 문화와 차이에 대해 직접 느끼고 존중해주는 방법을 체득한 기분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노잼 소리 들을까 봐 걱정이긴 하지만 이런 술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 수직적 권력 구조 없이, 술 마셔야 하는 부담감 없이,  주고받는 술 한잔에 평소엔 이야기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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