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는 약하다, 그래서 악하다 [공연예술]

연극 <헤카베>
글 입력 2019.03.1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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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살인에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

‘정의로운 살인’. 참 모순적인 말이기는 한데 또 이게 굉장히 그럴듯해 보이는 경우가 많아 이를 논하는 작품도 많다. 살인은 정의로울 수 있는가? 이미 살인자인 사람을 살인하는 것은 정의인가 또 다른 악인가? 법이 정의를 바로잡지 못했을 때 개인이 독단적으로 정의를 바로잡는 것은 선인가?

이 혼란한 물음들 사이에서 필자는 헤카베를 가리키며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헤카베한테는 그러고 싶다.



02. 약자가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

필자는 ‘창작집단 LAS’를 좋아하고, 그 안에 속한 배우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올리는 극을 좋아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수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여성에 관하여, ‘줄리엣과 줄리엣’은 ‘성 소수자’, 그것도 미디어나 공연에서 성 소수자는 대부분 생물학적 남성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여성 성 소수자를 그리고 있다.

‘헤카베’는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 된다. 재판이 단순한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닌 권력을 등에 업은 개인과 전쟁으로 노예 신분이 되어버린 개인의 싸움이 되었을 때, 그 판은 평평할 수 없다. 기울어진 판 위에서 헤카베의 목소리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런 판 안에서 ‘중년 여성’을 비추는 전형적인 고정 관념은 감정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모습일 것이다.

이야기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사위 플뤼메스토르의 눈을 멀게 한 죄로 재판을 받는 장모 헤카베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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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이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꾸 ‘엄마’라는 부담이 만들어낸 (주체적인 강함이 아닌) 피동 형태의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엄마’가 아닌 ‘여자’는 다 배제하는 말 같기도 하고. 여하튼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므로 관용구를 붙일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붙이지 않으려고 한다.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타인의 눈을 멀게 하며 대신 복수를 행한 강한 어머니! 이런 식으로 헤카베를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헤카베는 약했다. 스스로 ‘모든 여자 중 가장 비참한 여자’라고 칭하고, 자식들이 전쟁에서 죽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딸 폴뤽세네는 아킬레우스의 제물로 끌려가고 아들 폴뤼도로스는 사위에게 양육을 맡겼지만, 그에게 살해당했다.

‘약하다’와 ‘악하다’는 한 글자 차이다. 아니, 모음 하나, 획 하나의 그보다 더 사소한 차이다. 헤카베는 약하기에 악했다. 세상의 정의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헤카베와 같은 처지는 그 이해관계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가 없는데, 차라리 스스로 악이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세상은 사적인 복수를 행한 그를 ‘악’이라고 칭하겠지만, 헤카베는 악하지 않다. 그저 약했을 뿐이다. 약하지만 부러지지는 않는, 그런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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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모든 여자 중 가장 비참한 여자.

반전은 없었다. 세상은 가장 비참한 여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작품에서도. 그래서 헤카베는 스스로 정의가 되었다. 자신의 복수를 했고, 스스로를 처벌했다. 비참할지언정 비굴하지는 않았기에 헤카베는 처절했고, 가장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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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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