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특별한 심심함 - 연극 <비클래스> [공연예술]

성별 반전, 그게 뭔데?
글 입력 2019.03.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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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를 채우는 주연 배우 넷을 떠올려 보자.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갈등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소리를 지르며 욕설도 뱉는다. 주먹다짐까지 오가다가 결국 눈물을 흘리며 한 뼘 성장하는 스토리로 서사가 마무리된다. 마음이 찌르르 울리는 감동적인 내용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소재일지 모르나, 심심해서 더 매력적인 ‘맛집’이다.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커튼콜이 시작되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는 주연 배우 넷,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들의 성별은 무엇인가.

연극과 뮤지컬을 사랑한지도 꽤 오래된 듯하다. 티켓북을 몇 권 채우고도 남는 수많은 표들, 책장 세 칸이 훨씬 넘쳐 결국 바닥에 쌓아 두고 있는 프로그램북들, 그리고 그 안에 남은 공연의 흔적들. 이 많은 공연 중 여성 배우들이 주축이 된 공연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보면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고도 남을 것이다. 그만큼 뮤지컬과 연극 무대가 여성 배우에게 허락한 입지는 상당히 좁았다.



성별 반전, 이것 하나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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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연극 ‘비클래스(B Class)’가 무대에 올랐다. 2017년과 2018년에 이어 벌써 세 번째 공연을 맞는 ‘비클래스’는 얼마 전 캐스팅 발표 때 한 차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적 있다. 기존 남성 배우 넷과 여성 배우 한 명으로 이루어졌던 공연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여성 배우 넷과 남성 배우 한 명으로 이루어진 ‘성별 반전’ 회차가 새로이 추가된 것이다.

성별이 바뀜에 따라 스토리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지 관심이 커졌다.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서 서사가 바뀔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고,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새로 꾸리는 게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기존에 남성 배우들이 주연이었던 무대에 여성 배우들도 주축을 맡게 되어 기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연극 ‘비클래스’는 ‘꿈꾸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배경은 사립 봉선 예술학원, 에이클래스(A Class)와 비클래스로 나뉜 잔인한 공간이다. 학사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졸업 공연에서 패스 도장을 받아야 하지만, 비클래스 학생들끼리 꾸린 공연과 에이클래스 학생들끼리 만든 무대가 같을 리 없었다. 상처 받기 쉽고 상처 주기 쉬운 10대 후반, 하염없이 흔들리고 아플 나이였던 비클래스 학생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각자의 이야기를 펼친다. 상처를 공유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터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장하다 들꽃을 피워내는 것이 비클래스 학생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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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이 주는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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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평범한 성장 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나친 입시 경쟁이 주는 폐해, 그 사이에서 상처 받고 후회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바른 길로 지도해 주는 진정한 선생님까지,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비클래스’에는 무언가 특별한 공백이 있다. 설명으로 채우거나 감정으로 채웠다간 자칫 촌스러워질 수 있는 친근함이지만, ‘비클래스’는 그 공백을 채우지 않고 빈 곳으로 남겨 두었기에 이 극 특유의 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이 극에는 화해가 없다. 싸우고, 울고, 때리고, 욕하는 장면은 있지만 캐릭터들이 서로를 위로해주거나 ‘괜찮다’며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대신 자기 자신과의 화해, 용서, 그리고 치유를 보여줌으로써 잔잔한 감동과 아련함을 남긴다. 이들이 훗날 어떻게 되었을지는 관객의 상상에 달려 있다. 여전히 갈등하고 있을 수도 있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앞장서서 위로를 건넸을 수도 있다. 결말이 어떻게 되었든 극에서 그 장면을 직접적으로 설명했다면 그저 그런 치유 서사가 되었을 수 있지만, ‘비클래스’가 지은 매듭은 상당히 성겼다. 공백의 매력이다.

‘비클래스’가 주목하고 있는 서사는 캐릭터 간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오는 유대감과 우정이다. 이 극 속 그 어떤 캐릭터도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다. ‘승’에서 시작해 ‘전’으로 끝나는, 그런 캐릭터들이다. 주인공 ‘택상’마저도 여전히 성장 중이고, 눈물을 웃음으로 삼키는 성숙한 ‘치아키’는 마지막에 기어이 눈물을 흘린다. 극의 공백은 결말뿐 아니라 캐릭터의 서사에서도 보이는데,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지 않아 세련된 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 친구들 간의 의리와 자신의 삶 사이에서 크나큰 고민을 할 때, 극에서는 주인공이 친구들과 얼마나 돈독한 우정을 쌓았는지를 조명하는 식이다. 사실 이 극에서 주인공이 무슨 선택을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선택을 했어도 어떻게든 상처를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용서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용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용서 말이다.



성별 반전, 정제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분명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성별 반전 회차에서 기대한 독특함은 여성 캐릭터만이 가질 수 있는 서사적 특별함이었지, 거친 액션이나 욕설을 제거하는 ‘정제’가 아니었다. 주먹다짐은 남학생들에게만 허락된 싸움이 아니며, 접미사 ‘-놈’은 사람을 낮추는 말이지 남성을 낮추는 말이 아니다. 주먹을 이용해 싸우는 장면을 굳이 뺨을 때리는 장면으로, ‘-놈’을 ‘-년’으로 바꾸어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은 성별 반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 대사나 액션에서 느꼈던 아쉬움은 훗날의 진보를 위한 제언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는 여성의 이야기에 지나칠 정도로 야박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평평한 운동장에 서 있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할 터다. 이 상황에서 과연 후자의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할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100개의 남성 서사와 5개의 여성 서사가 있을 때, 똑같은 기준과 똑같은 눈높이로 서사의 질을 평가하는 건 조금 박한 태도가 아닐까. 물론 여성 서사의 개수가 적다하여 모든 여성 이야기의 질이 낮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문화예술계 내에서 남성이 차지했던 비율과 입지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여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이 꽤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박수를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여성 서사가 100개가 될 때 비로소 성별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우리는 조금 더 응원하고 조금 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여성 서사’라는 말 하나가 호평의 이유까지는 될 수 없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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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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