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상치 못한 것으로부터의 위로 [기타]

눈이 내리다
글 입력 2019.03.1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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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던 내게 가장 간절한 바람은 서울에 가는 것이었다. 서울에 살면 원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는 수고로움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대학로를 내 집처럼 드나드는 것이 꿈이었다.

생각해 보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쏟는 버릇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대하던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마지막 학기까지 가히 쉼 없이 달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명목 아래, 문화예술에 관한 수많은 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그렇게 가속 페달을 밟은 대학 생활은 이보다 더는 몸에 무리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 결과물을 내놓고 장렬히 끝을 내렸다.

사실, 만만하게 봤다. 학기를 병행하지 않는다면, 학교 핑계를 대며 하지 못한 계획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추진력을 잃은 두 다리는 몇 걸음을 떼는 데도 힘겨워했다.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던 과거와 판이해진 내 모습을 처음엔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나태해서라고, 의지박약이라고 다그쳤다. 세워 둔 계획은 순서를 이루며 끝이 없는데, 주저 앉을 시간이 없는데, 정작 달리지 못하는 다리가 야박했다.

심지어 살면서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문화예술에 대한 노력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0년 넘게 사랑해 마지않았던 대상을 두고도 의무감과 회의를 벗어나지 못하자 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번아웃(burnout)이었음을 안 것은 조금 나중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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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나를 벼랑 끝까지 밀어내며 승부수를 던졌는데, 마음에 괴로움만 남긴 채 정통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충동적으로 다음날 아침 평택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친구네 집으로 떠났다. 마음 속에 떠나고 싶다는 일념만 가득해 그것을 따른 행동이었다. 그곳에서 난 오래간만의 자유를 느꼈다. 내가 숨쉬는 현실을 잠시 얼려둔 채, 마치 다른 내가 된 것처럼 살았다. 개들을 산책 시키고, 장을 본 재료로 요리를 하고, 일찍 찾아오는 밤의 어둠을 자연스럽게 맞이한 시간은 날 참 편안하게 만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거실 커튼을 걷는데, 통유리 너머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난 무언가에 이끌리듯 외투를 입고 마당으로 나섰고,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내리는 그것을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뜬금없이 왜 눈물이 나는 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그 광경에 홀린 듯, 한참을 울면서 하얗게 덮인 세상을 쳐다보는데, 정말 큰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기본적으로 움츠러든 채, 이렇다 할 행동을 하나 하는데도 큰 결심이 필요할 정도로 소극적이었던 나와 달리, 크고 넓은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정없이 펑펑 내리는 그 눈으로부터 일종의 해소를 느꼈다. 탁 트인 시골 풍경 위로 쏟아지는 그 많은 눈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멈추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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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이전만큼의 에너지를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몸을 사리게 되었다고 할까. 어렵사리 인정한 번아웃 이후 최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가 계획한 ‘순서’에서 벗어나 당장 ‘내 마음이 가는 것’을 해보려 한다는 것이다. 머릿속엔 생각이 너무 많은데 그것에 치여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는 것’이다. 마치 앞뒤 안 가리고 펑펑 내려버린 그 날의 눈처럼.

적잖이 날 당황 시킨 문화예술에 대한 통증도 부담 대신 마음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10년 전의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공연에 강렬히 이끌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저 설렘과 즐거움으로만 가득했던 원초적인 접근을 취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줄줄이 늘어진 계획에 하나라도 확신이 서지 않으면 시작조차 못 하는 불안이 아니라, 작더라도 가장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힘으로 ‘나아가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무 기대가 없던 대상에게 예기치 못한 큰 위로를 받은 그 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특별한 경험을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삶의 새로운 지표로 삼고 싶다.




[염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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