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쓴다, 삶이 쓰다, 달을 쏘다 [공연예술]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글 입력 2019.03.15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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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을 좋아했다. 한창 입시 경쟁에 내몰려 있었던 고3 때는 힘들 때면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필사하기도 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시인의 고백을 따라 적다 보면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초연해지는 것 같았다. 별 헤는 밤, 말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정돈했던 밤들이 떠오른다.


그 때의 밤이 아직 생생한 탓일까, 시인의 생애를 담은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작품이었다. 무대를 가득 메울 시인의 말들과 그에 더해질 음악이 궁금했고, 다윈 영과 금란방으로 내게 인생작을 선물한 서울예술단이 제작을 맡았기에 더더욱 기대가 컸다.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中



이 극에서 동주는 끊임없이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격동의 시대 안에서 시를 쓰는 자신을 나약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시위 현장에서 맞서 싸우는 친구를 보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동무들은 그의 시를 끊임없이 응원한다. “듣고 싶다, 네 시!”라고 외치던 처중과 동주의 시를 ‘메마른 이 세상 단비 같았던 시’라고 이야기하는 선화의 목소리에, 동주는 시를 써나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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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 감옥에서 생체 실험을 당한 후 흐릿해져가는 정신을 붙잡던 그의 머릿속에 동무들이 하나둘 스친다. 그는 총과 칼 앞에 나약한 시, 동무와 민족이 바라던 시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별 헤는 밤’을 한 글자 한 글자 토해낸다. 시대를 향해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별 헤는 밤’을 내뱉는 동주의 모습은, 초반에 느꼈던 아쉬움들을 모두 잊게 해주었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시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별 헤는 밤 한 줄에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윤동주의 시 한 줄은 잔혹한 시대에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아 준 하나의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를 의심했지만, 그가 청춘을 바쳐 써내려간 시는 격동의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심지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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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과 서울예술단과 뮤지컬을 사랑하는 내게 ‘윤동주, 달을 쏘다’는 여러모로 의미가 큰 극이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초반부터 아쉬운 점이 조금씩 보였다. 이 이야기가 실제 윤동주 시인의 생애라는 점에서 오는 울림과,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극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일본군의 전쟁 장면은 너무 길고 장황했던 데 반해, 송몽규, 강처중, 이선화라는 인물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가상 인물인 선화라는 캐릭터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다. 개인의 서사 없이 연인을 지고지순하게 응원하는 전통적 여성관을 답습한 입체감 없는 인물이었으며, 주인공의 각성 계기로 작용한 후 상의를 탈의하는 일본군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선화의 모습은,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에 관한 문제의식까지 끌어올 것도 없이 뻔하고 지루했다.


선화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 시대 청춘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잔인함을 생각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화는 제작자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하나의 편리한 장치, 그 이상의 역할을 선화에게서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정말 아쉽다.




윤동주, 달을 쏘다



솔직히 ‘달을 쏘다’라는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극을 조금은 실망스럽게 기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주가 끊임없이 쏘려 했던 달이 산산조각이 나 하늘의 별이 되는 마지막 장면은 극의 아쉬움을 모두 상쇄시켜 주었을 정도로 환상적이었고 아름다웠다.


돌을 던져 하늘의 달을 떨어뜨리려는 것, 그 시대의 독립운동은 그런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이 극에서만큼은, 높고 단단한 벽에 끊임없이 머리를 박고 피 흘려야 하는 시대의 아픔이 산산조각나 하늘의 별이 된다. 온 하늘을 뒤덮고 세상을 밝히는 별이 된 달의 조각들은,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는 윤동주의 시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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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이 끝나고 무대 뒤편에 비친 윤동주 시인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청춘을 바쳐 시를 쓰고 하늘 높은 곳의 달을 쏘았던 그들을 기억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남겨준 이 땅을 가슴 뜨겁게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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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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