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히피 로드] 볼리비아 – 히피의 후예를 찾아서

글 입력 2019.03.1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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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 히피의 후예를 찾아서



글 - 여행작가 노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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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사마이파타(Samaipata)에서 체류할 때였다. 대도시 산타크루즈에 사는 가족과 연인이 소풍 삼아 들리는 ‘쿠에바스 폭포’와 잉카 전 유적지 ‘엘 푸에르테’ 정도가 볼거리의 전부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벨기에, 네덜란드 등 30여 개국에서 온 이민자와 히피, 원주민이 어울려 사는 여행자 마을. 주말이면 쾌 시끌벅적한 시장이 섰고, 한 달에 한두 번 초콜릿가게에선 영화를 상영했다.


그날도 영화를 보러 간 참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영화가 상영되길 기다리는데 덜컹 문이 열리며 낯선 이방인들이 들어섰다. 트렁크를 끌고 다니는 여느 관광객과 달리 텐트, 매트, 침낭에 곤봉과 훌라후프 등 잡동사니라고 불러도 좋을 물건을 배낭에 주렁주렁 매달고 차랑고(안데스 지방의 기타풍 현악기), 타리카(안데스 지방의 나무피리), 카혼(나무상자처럼 생긴 페루 타악기)을 안고 있었다. 히피들이었다. 먼저 말을 건넸다.


- 안녕. 난 한국에서 온 로, 사마이파타에 온 지 얼마나 됐니?


- 산타크루즈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방금 도착했어. 우린 무지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야.


- 무지개 가족?


- 여기서 얘기해 줘도 직접 만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거야. 우선 페이스북에서 ‘아르코이리스 파밀리아 Arcoiris Familia’ 혹은 ‘레인보우 패밀리 Rainbow Family’를 검색해 봐. 초승달이 뜰 때부터 그믐달이 질 때까지 한 달 간 숲이나 강변에서 무지개 모임이 열려. 이번 달엔 볼리비아야. 텐트를 갖고 있으면 너도 무지개 모임이 열리는 숲으로 와. 우선 사마이파타에서 차를 빌려타고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카를로스 농장으로 가. 농장 옆에 오솔길이 있을 거야. 2~3시간 정도 산길을 오르면 무지개 캠프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우리도 초행이라 아는 게 이거 밖에 없어. 숲길 중간 중간에 무지개 표시가 있을 테니 그걸 따라가면 돼. 참, 나는 우루과이에서 온 가브리엘라, 다들 가비라고 불러.


무지개 가족과의 첫 조우였다.


무지개 가족의 기원은 20세기 인류문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예술 축제, 우드스탁(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 리빙 시어터의 설립자이자 배우, 시인, 화가였던 줄리안 벡의 아들 갈릭 벡과 1988년 <그 많던 꽃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를 출간하게 될 베리 아담스는 1969년 우드스탁을 체험한 뒤 ‘레인보우 패밀리’를 만들기로 한다. “사흘이 아니라 한달 동안 이런 시간을 같이 보내면 전 세계가 가족이 될 거야!”


가족이라곤 하지만 ‘비폭력 평등주의’라는 원칙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규율도, 가입조건도 없이 느슨한 모임이었다. 자연을 위한 찬가를 부르고 명상을 하고픈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레인보우 게더링(Rainbow Gethering). 1972년 봄. 콜로라도주 딸기호수에서 첫 모임이 열린다. 이들은 스스로를 ‘레인보우 패밀리’라고 선언한다.


그 후 반세기가 흘렀다. 베트남전은 끝났고 ‘반전’과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던 히피운동도 사그라들었다. 1960년 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체제 반문명 자연찬미파의 사람들’ 정도로 기억되고 ‘장발에 치렁치렁 기운 옷을 입고 머리엔 꽃을 꽂고 다니는 차림’만이 패션잡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 그 사이 무지개 모임은 유럽, 아시아, 중남미로 퍼져나갔다. 무지개 모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대중매체에 노출이 되지 않았을 뿐.


가비가 떠나고 며칠 후 나는 시장을 어슬렁거리는 러시아 출신 히피 샤샤,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 미셸, 기욤, 마들렌과 함께 무지개모임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프차를 빌려 타고 덜컹덜컹 비포장도로를 달려 카를로스 농장에 닿은 건 해질 무렵. 곧 먹물을 끼얹은 듯 까만 밤이 시작되었다.


‘대체 산길을 얼마나 더 올라가야 무지개 캠프에 닿을까?’


해발 2천 미터 안데스 산맥의 아랫자락을 헤매길 두 시간 째.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가곤 있지만 샤샤나 프랑스 친구들도 초행이긴 마찬가지. 이정표도 없는 마당에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저기 봐! 무지개 표시야!”


마들렌이 소리쳤다. 손전등으로 길옆에 놓인 돌멩이를 비췄다. 손바닥 크기의 돌에 색색으로 그려놓은 무지개, 그것은 분명 무지개 가족의 표식, 빨간 화살표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저마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던 까닭일까? 모두 안도의 한숨을 후우 내뱉었다.


무지개 표시를 발견하고 반시간쯤 더 걸어가자 이정표 하나가 더 나타났다. 그리고 나무판자엔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세 언어로 쓴 환영문구와 무지개 모임에서 지켜야 할 수칙이 씌어있었다.



노 카르네(No Carne)

노 알코올(No Alcohol)

노 디네로(No Din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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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술, 돈거래 금지. 히피들 대부분이 채식주의자고 무지개 모임에선 저마다 가진 걸 함께 나눠쓴다던 가비의 말이 떠올랐다. 하긴 러시아 히피 샤샤도 술, 고기를 권하면 매번 사양했다. 히피들은 또 환각 버섯, 환각 선인장, 환각 꽃씨 같은 천연 환각제나 대마는 약으로 여기지만 대다수가 즐기는 술은 마약으로 여긴다고 했다. “술 마시고 제 아내나 자식을 패는 인간은 있어도, 대마 피고 제 아내와 자식을 패는 인간은 없거든!” 히피들은 담배를 권하면 비소, 카드뮴 등 독극물이 들었다며 거절하고 대마초나 담뱃잎을 손으로 말아서 피웠더랬다.


어둠으로 가득한 숲 사이로 샤샤가 비추는 불빛이 반짝거렸다. “샤샤, 이쪽으로 와!” “응, 보여!” 안심하고 발길을 돌렸다. 고갯마루로 올라서자 너른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림자.


“올라!” 인사를 하자 그림자들이 일어나 하나, 둘 다가왔다. 그리곤 두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형제, 집에 온 걸 축하해!” 불가에 모여 있던 예닐곱 명이 전부라고 여겼는데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수풀 속에서, 나무속에서, 연기인지 안개인지 모를 뿌연 장막 속에서 담요를 덮어쓴 사람들이 하나, 둘 연이어 나타나더니 차례차례 우리 일행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형제여, 집에 온 걸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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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나타난 히피 형제들의 포옹을 받으며, 1960년대 싹튼 히피들의 세계로 빨려 들었다. 마치 무지개란 이름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위 글은

<남미 히피 로드>

(2019년 4월 15일 발간)의 일부입니다.






노동효



노동효 프로필.jpg



2010년부터 2년간 '장기 체류 후 이동 Long stay & Run'하는 기술을 연마한 후, 한국과 다른 대륙을 2년 주기로 오가며 '장기 체류 후 이동'하는 여행기술을 평생 수련하고 있는 여행가.


EBS세계 테마기행 여행작가. <길 위의 칸타빌레>,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길 위에서 책을 만나다>,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남아메리카를 떠돌며 전직 방랑자였거나 현직 방랑자인 자매, 형제들과 어울려 보낸 800일간의 기억. 방랑의 대륙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가 건져 올린, 사금파리 같은 이야기를 당신 앞에 내려놓는다.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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