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거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충분한 [공연]

글 입력 2019.03.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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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넓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속 극이 시작한다. 불빛이 어지러이 움직이며 같은 옷을 입은 수많은 배우가 어둠 속에서 대사를 한 마디씩 외친다. 마치 끊임없이 화면을 겹쳐놓은 영상 디졸브를 보는 듯하다. 정신없이 극을 따라가려 애를 쓸 때 즈음, 드디어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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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하거도라는 이름의 유토피아와 다름없는 섬, 그 속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비극을 다룬다. 섬과 동명의 주인공 하거도는 하거도에서 벙어리 어머니에게 태어나 섬에 관광 온 부부에게 맡겨지나, 시험관 아이를 가진 양부모에 의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하거도로 다시 돌아온다.


하거도는 곧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남은 생을 보낸다. 후에 도지사와 그 일행에 의해 아사로 수용소 인원이 전멸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탈출 계획을 세우는데, 하나뿐인 동료 26-7284와 아들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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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밖의 세상을 경험한 하거도는 바깥세상의 아름다움을 온 힘으로 알려주는 등 아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지만, 아들은 배고픔에 친모를 고발하고, 26-7284를 굶주린 사람들에게 내주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이를 본 하거도는 결국 아들을 죽이고 본인 혀를 뽑고 수용소에 직접 불을 질러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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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 구조는 죽은 하거도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을 중심으로, 과거 회상을 하며 비극의 조각을 끼워 맞춰나가며 그와 함께 사건의 실체, 반전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새로운 형식은 아니다. 두 달 전 본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만 해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으니. 그런데 그 형태가 ‘재판’이라서 기대한 것이 있었다. 재판이라는 건 결국 판결이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하지만 이 연극은 그 판결을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그래서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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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다루는 게 참 아쉬웠다. 미투 운동 일 년 뒤 등장한 이 연극의 여성 캐릭터들은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지닌 엄마, 멍청한 악, 그리고 창녀로만 존재한다. 판사를 맡은 여성마저 종일 짜증만 낼 뿐이다. 이 극에는 수용소 내 남녀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허락하는 ‘포상 혼인’이라는 괴상한 제도가 있다. 성욕을 풀게 해준다지만 피임은 돕지 않는 이 관계가 여성 수감자들에게 과연 ‘포상’인지 의문이다.


한없이 어둡고 심각한 비극이지만, 중간중간 정치 풍자로 유발하는 웃음 포인트도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마음을 잠깐씩 환기해 주었다. 특히, 누가 봐도 파면된 '그분'이 등장할 때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십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보는 내내, 저 많은 사람이 다 같이 연습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초반부 어둠 속에서 빛을 들고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장면!


나는 이 연극의 시놉시스를 처음 읽었을 때,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 떠올랐다. 어둠, 좁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서스펜스 스릴러. 공연은 충분히 내 기대를 충족시켰다. 어둡고 서슬 퍼런 조명과 긴장감을 살리는 사운드 등은 몰입을 더욱 도왔다. 따라서 115분 동안 완전히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모두 조연부터 주연까지 차례로 나와 인사했다. 코믹한 역할, 비열한 역할, 비참한 역할을 맡았던 모든 배우들은 하나같이 심각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퇴장한다.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는 게 아닌, 진지함을 끝까지 유지한 덕분에 극의 여운이 짙게 남았다.


프리뷰에도 썼듯, 나는 연알못이다. 따라서 로맨틱 코미디 연극만 주로 봐왔던 내게 <하거도>는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특히, 평면적인 화면 속에 갇힌 영화와 달리, 무대 위 곳곳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연기와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무대 장치 덕분에 즐거웠다. 매번 백퍼센트 똑같지 않은 것도 공연이 주는 매력이다. , 연극이라는 세계에 발 딛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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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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