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겪어보지 않은 비극에 대하여, ‘오직 두 사람’ [도서]

글 입력 2019.03.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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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팩트 따윈 모르겠다.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김영하, <오직 두 사람> 작가의 말 中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상실을 경험한다.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때로 어떤 것은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떤 상실은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닥치며, 어떤 상실은 천천히 찾아온 뒤 삶의 근본까지 깊이 침투하기도 한다. 상실에 수반하는 변화는 일상을 흔들어 놓는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은 되돌릴 수 없기에, 설령 잃어버린 대상의 빈 자리를 채우더라도 삶은 결코 이전과 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부정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상실은 일종의 비극이다. 비극에 대한 가장 오래된 이론 중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비극은 운명에 의해 파괴되는 고귀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는 주인공이 운명에 의해 파괴될지라도 관객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숭고함과 고귀함을 체험하게 되며, 감동과 충격을 받음으로써 얻는 쾌감이 고통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특히 이를 위해 비극의 주인공은 일반 서민보다 신분이 높은 왕족이나 귀족이어야 한다. 관객은 비극의 효과로서 감정의 해방 상태를 경험하게 되며, 이것이 고대 비극의 “기능적”인 측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은 어떨까. 신분 사회는 무너졌고, 시대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불가항력의 운명은 미신으로 취급되며 개인의 삶은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이라 믿어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온전히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잃으며 산다. 현실에 꿈을 희생하기도, 폭력에 존엄을 잃기도, 때로는 불나방처럼 스스로 파멸을 향해 뛰어들기도 하면서. 그래서 상실은 비극이지만, 살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같은 맥락에서,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을 매체로 접하다 보면 비극은 이미 산재해서 굳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해서 체험해야 될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자의 비극에 휩싸일 때 타인의 고통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무감각해지고, 겪어보지 않은 고통에도 쉽게 평가를 내리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쁘다는 이유로, 신경 쓸 일이 많다는 이유로 나 아닌 사람의 고통을 외면해 왔다.

‘오직 두 사람’의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이런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시대에도 비극 이론이 존재한다면, 관객이 해야 할 일은 그냥 ‘느껴 보기라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조금씩 잃어 온 것들이 마음을 마비시킬지라도, 그 곳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작가는 그를 위해 계속 이야기를 쓸 것이니, 관객으로서 나는 최소한 느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단편집 ‘오직 두 사람’에 수록된 일곱 개의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모두가 상실을 경험한다. 그들이 잃어버린 대상은 다양하다. 사람이기도, 사랑이기도, 열망이기도 희망이기도 하다. 상실에 대처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외면하고 도피하거나, 체념하거나, 대면하고 그 속으로 뛰어들거나. 각자 상황도 성격도 다르지만, 김영하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련의 행위들일 것이다.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사건의 중심인 것은 아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독자는 비극을 감상하는 관객이 되기도 하지만 비극을 감상하는 관객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객이 되기도 한다. 날카롭고 섬세하게 묘사된 인물의 정서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 같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상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어보지 않은 상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체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극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1. 타인의 비극에 대한 태도


인생의 원점
인아를 인생의 원점이라고 느끼면서도 결국 그녀의 삶에 진심으로 관여하지 못한 서진. 인아를 잃고 나서도 그녀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도취되는 그의 모습은 타인의 고통에 관여할 줄 모르는 미성숙함의 표상이다.

슈트
평생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눌러 왔던 ‘아버지’라는 사람, 가진 적도 없는 존재를 잃어버린 지훈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인 슈트에 대해 매우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만 화자는 어딘가 섬뜩함을 느낄 뿐이다.

옥수수와 나
자신의 사정에는 너그럽고 타인의 사정에는 한없이 엄격한 그의 모순이 결국 스스로를 옥죄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는 이혼한 아내의 남자관계까지 간섭하면서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불륜을 저지른다. 사장 아내와의 섹스로 얻은 미친 듯한 필력의 결과물이 쓰레기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되는 장면은 모순으로 가득한 삶이 결국 옥수수에 불과한 허상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최은지와 박인수
‘나’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아내의 믿음, 회사 안에서의 평판도 잃는다. 회사 사람들은 타인의 난처한 비밀에 대해 호기심과 가십으로 대처한다. 피상적인 정도를 넘어 관여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위선이여, 안녕’.



2. 비극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신의 장난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함께 겪는 비극. 결말 없는 비극은 출구 없는 방 탈출 게임처럼 잔혹하다. 어쩌면 지옥이 계속되고 절망이 끝나지 않을지라도,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오직 두 사람
세상에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 희귀 언어의 사용자들이 있다. 한 명이 사라지면 어둠 속에 홀로 남겠지만, 그 앞에는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 살아만 있다면 살 수 있다. 모국어만큼 편하지는 않을지라도, 언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듯이.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가 사라진 이후 윤석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아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줄 알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골은 깊어져 간다. 끝내 많은 것을 잃었더라도 삶이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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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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