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8. 내 삶의 작은 숲, 내 삶이 작은 숲

글 입력 2019.03.24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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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 초, 말라가, 구름과 비



<리틀 포레스트> 스페인으로 오기 전 보았던 한국 영화 중 하나였다. 여느 20대와 같이 취업을 준비하던 혜원(김태리)이 고향에 내려오며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레 고향으로 온 혜원을 보며 친구 은숙은 집요하게 물어본다. "너 왜 내려왔어?"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푸스스 웃으며 답을 하던 혜원의 음성이 맴돈다.


"배가 고파서 왔어. 진짜, 허기져서 온 건데."


한국도 아닌 스페인에서 갑작스럽게 <리틀 포레스트>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말라가대학교에서 주관한 여성 문화 주간 때문이다. 말라가 대학교에서는 11월 초, 한국 여성 감독들의 영화 몇 작품을 선보이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리틀 포레스트>. 자막을 보지 않고도 100% 이해할 수 있는 영화라니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과 신나게 상영 장소로 향했다. 누군가 옆에서 신나게 떠들어도 자체 귀마개를 한 것 같은 삶을 살다 보니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가 참 반가웠다. 고민하지 않고, 헷갈리지 않고, 몰입하여 무언가를 본 것이 얼마만이었는가.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자기만의 작은 숲을 찾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런저런 현실에 시달리다 고향에 내려가 매일 맛있는 걸 먹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놀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삶. 그것이 혜원이 찾은 자기만의 작은 숲이었다. 한국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땐, 그 삶이 얼마나 부럽던지. 당장 귀농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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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베이킹한 애플 크럼블
 


그러나, 말라가에 와서 본 혜원의 삶은 더 이상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혜원이 크림 브륄레며 꽃 튀김을 해 먹는 것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아, 나도 여기서 진짜 잘 먹고 잘 사는데.' 말라가에 온 뒤로는 오늘 뭘 먹을지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더 이상 식사는 수업과 팀플 시간에 쫓겨 바쁘게 입안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음미하고 함께 나누기도 하는 즐거움의 시간으로 변했다.


혜원이 친구들과 시냇가에서 다슬기를 잡는 것을 보면 '크, 말라가 해변에서 노는 것에 비하겠냐' 싶었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피부가 따가울 때, 망설임 없이 들어가 물장구쳤던 시원한 바다. 수영복이 없을 땐 그냥 책 한 권 들고 가 햇볕 아래 누워 낮잠도 자고 책도 읽곤 하는 해변.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나는 더 이상 혜원의 삶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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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해변'하면 빼놓을 수 없는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Tomar el sol. 직역하면 '해를 받다', 의역하면 '일광욕을 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소개를 할 때 "내 취미는 일광욕 하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스페인에선 자기소개를 할 때 꽤 빈번히 등장하는 취미가 일광욕이다. 이는 단순히 남부나 해안가 근처의 도시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고 스페인 전역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만큼 바다와 해를 사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고 그만큼 여유로운 삶이 그들의 삶이다. 이런 스페인인데 그중에서도 쾌청일수가 284일인 말라가에 왔으니 매일 tomar el sol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처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 헤맸었다. 힘들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표같은 공간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난 나만의 작은 숲을 찾지 않았다. 어느덧 내 삶 자체가 작은 숲이 되었기 때문이다.



+11月의 일기 中


"요즘 나의 삶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보다 더 영화 같다. 포근하고 여유롭다. 조용하고 밝다. 행복하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보장되는 삶이 바로 이런 걸까?"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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