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WHEEL OF FORTUNE 10: 운명의 연쇄,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글 입력 2019.03.19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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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OTEA]
WHEEL OF FORTUNE 10
운명의 연쇄,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손을 펴보자. 열 개의 손가락이 당신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인류가 가진 최초의 계산기기도 하다. 우리는 어린 날 손가락을 굽히며 숫자를 세었다. 그것은 인류도 마찬가지다. 원시인들은 자기 손가락으로 물건의 수를 세었고, 숫자 10은 십진법의 기본이 되었다. 우리의 손가락이 8개였다면, 8진법이 발달했을까? 하여튼 시간과 공간을 최초로 분류한 숫자의 탄생에 기여한 이 위대한 계산기의 끝은 10이다. 그래서 10은 만족과 충만, 최고나 정상 그리고 충족을 의미한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세속의 신자에게 주는 오계와 승려에게 주는 오계를 등을 합한 십계가 존재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수학적 수치가 아닌 상징적 의미로 10을 받아들였다. 성경에는 10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열가지 재앙을 내렸고, 십계명을 세우게 했다. 예수는 나병을 앓는 열 환자를 치유하기도 했고, 레위기에서는 이스라엘 땅에서 수확한 십분의 일은, 그것이 곡식이든 과일이든 가축이든 주에게 바친다는 규정이 있다. 이는 십일조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 10은 아이러니하게도 1+0으로 1이 다시 시작하는 수이며,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가장 가파른 산을 넘어온 늙은이는 어쩌면 거대한 우주의 원리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10은 동시에 완성이자 시작이다. 0부터 9까지의 여정을 끝마치고 다시 1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한한한 윤회를 상징한다. 타로카드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두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A. 이미 운명은 정해졌으니 좋든 싫든 순응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B. 운명에 굴복하지 마라. 당신의 노력에 따라 운명은 변화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거대한 우주의 원리에서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된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변수가 많아 예측하기 어려운 새옹지마라 하지 않았는가. 갑자기 마주한 모든 사건은 사실 저 멀리서 부터 온 것일지도 모른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며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하는 카드다. 시작과 끝이 무한히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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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스핑크스


수레바퀴(ROTA)는 굴러가며 이동하는 성질이 있다. 굴러가는 바퀴는 진행되고 반복되는 영원을 의미한다. 수레바퀴에 새겨져 있는 알파벳을 조합해 보면, TARO :타로, ROTA: 바퀴(라틴어), ORAT: 말하다(라틴어), ATOR: 이집트 생명의 여신 , TORA:히브리 율법집 으로 읽을 수 있다. 수레바퀴에는 영어 알파벳으로 적힌 ROTA 외에 히브리어로 적힌 글자가 있는데, 이는 야훼(Yahweh)라는 글자이며, 이는 우리가 익숙한 여호화를 뜻한다. 바퀴 안쪽에 세모와 원, 물결무늬로 만들어진 기호는 과거 연금술사들이 이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라 믿었던 4원소를 상징한다.

수레바퀴 위에는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스핑크스가 앉아있다. 스핑크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지혜로운 안내자, 수호자를 의미했다. 칼을 들고 있는 스핑크스는 엄격하고 결단력있음을 나타낸다. 스핑크스는 동시에 신전을 수호하는 영물로 취급되기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스핑크스의 퀴즈는 이 카드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든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그 정답은 사람으로, 사람이 늙는 과정을 아침-낮-밤 순으로 묘사한 것이다. 해가 지면 또 다른 해가 떠오르듯 이 수수께끼 또한 윤회와 관련된 것이다.


그 아래에는 수레바퀴를 등으로 밀어 올리는 듯한 여우의 형상이 있다. 이는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로, 죽은 자의 영혼의 수호자이자 영혼의 무게를 재어 부활을 결정하는 심판자이다. 스핑크스와 아누비스가 수레바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생과 사가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레바퀴 왼편에서 아래쪽으로 유영하는 황금 뱀은 6번 연인 카드에 등장했던 뱀과 같은 성격을 띈다. 인간을 탐욕과 나태함, 게으름으로 유혹해 죄악과 타락으로 떨어뜨리는 어두운 존재지만, 동시에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제우스에 대항한 거대 거인 티폰을 의미한다. 상체는 인간 남성이고 하체는 거대한 뱀으로 팔 끝에 100개의 뱀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거대 거인 티폰의 깃털과 날개는 강력한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제 수레 바퀴 밖을 보자. 앞서 언급한 4원소의 기호는 천사, 독수리, 사자, 황소가 그리스의 4원소론 (공기, 물, 불, 흙)와 매치된다. 이는 4원소로 이루어진 우주가 신의 섭리에 따라 반복되고 윤회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반복된 운명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또한 사계절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위치를 고려해보면 계절의 순환과 연관지을 수 있다. 신비로운 보라색 구름들에 가려진 형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상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물병자리에 해당하고,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수호자를 의미한다. 송아지는 황소자리에 해당하고 의지력과 존엄성을 의미한다. 사자는 사자자리로서 남성적 원리와 힘을 의미한다. 독수리는 전갈가리로서 권력과 영광을 의미한다. 네 형상은 모두 황금색이며 날개를 가지고 있는 권능이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 모두가 책을 한권씩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진실의 기록자 혹은 그들 스스로조차 끝없는 학습을 하는 중이라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이 학습하고 서술해나간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기도 하다. 한 운명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을 하늘의 뜻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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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yphys (1548–49) by Titan
Prado Museum, Madrid, Spain


완전해진 것, 무르익은 모든 것은 죽기를 원한다 ! [...]그러나 설익은 것들은 하나같이 살기를 원한다. [...]고통받는 모든 것들은 살기를 원하는데, 이는 성숙해지고 기쁨을 맛보고 열망을 갖기 위한 것이다. [...]


이는 더욱 멀리 있는 것, 더욱 높이 있는 것, 더욱 밝은 것을 향한 열망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를 볼 때마다 필자는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를 떠올리곤 한다. 시지프스는 뾰족한 정상에 커다란 돌덩이를 굴리는 형벌을 받은 저주받은 인간이다. 그가 지은 죄는 신에게 대항한 죄, 겸손하지 못한 죄였다. 하지만 저주받은 운명이지만 시지프스는 한순간도 절망하지 않고 돌을 굴린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한다고 역설했다.


필자는 시지프 신화야말로 인간의 비극적인 ㅡ 아이러니하지만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은 그 스스로가 정교하게 세운 사회구조에 얽매일 뿐 변화시킬 수 없다, 혹은 모든걸 자신의 거울로 생각하는 인간은 편협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다ㅡ삶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결과는 끝없는 연쇄로 이어질뿐이라도, 돌을 이고 꿈을 꾸는 시지프스는 고귀하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고귀하다. 사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시지프스는 어쩌면 돌을 영원히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모두가 각자의 돌을 굴리며 산을 오른다.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난 민들레처럼 고통과 한계 속에서 꽃피는 행복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인류 문명은 발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고독과 상실감을 느낀다. 인본주의 심리학에 참여한 실존주의 상담사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내면을 내적인 공허감과 고독감, 불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사회는 개인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경제적 이익 추구를 삶의 목표로 삼게했다. 이런 현상은 시대의 집단적 불안에 대한 심리적 방어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는 신경증적 불안이 마치 중세의 흑사병처럼 현대인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의 특징을 지닌 현대사회는 인간의 삶을 쇠우리에 가두고 니체적 의미의 '가련한 안락'에 빠져들게 되었다. 인간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자기에만 몰두해 자기를 상실하는 역설, 즉 자아의 상실이 현대의 중심문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심리상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실존주의 치료자로 이름을 널리 알린 얄롬은 심리학 이론 뿐만 아니라 철학적 지혜를 치료에 활용했다. 그는 특히 인간의 내면을 향한 자아실현의 과정, 자신의 잠재능력을 인식하는 가능성을 니체 철학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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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이성이 잠든 동안 괴물이 태어난다
1797~1798


얄롬은 인간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네 가지 고뇌를 이야기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이 삶을 이끄는는데 필요한 자유와 책임감(이는 동시에 불안을 유발한다), 고립, 인생의 무의미가 그것이다. 이처럼 얄롬의 실존적 심리치료는 우리를 괴롭히는 내적 갈등이 억압된 본능적 추구, 혹은 내면화된 중요한 성인, 잊혀진 외상적 기억 잔재들과의 투쟁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실존의 '주어진 것'에 대한 직면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 실존적 심리치료는 실존에 주어진 중요한 근본 사실의 직면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의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현재의 선택능력을 주목했다.

인간은 이런 실존적 갈등을 직면하고 심지어 넘어서는 능력이 있는 존재다. 이런 전제가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시작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심리치료는 환자의 특정 증성을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적 삶과 본질적인 인간 조건의 고통을 깨닫고 자신 안에 있는 힘을 발견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을 추구했다. 얄롬은 그의 저서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는 그리스철학자의 지혜를 통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프랑스 사상가 라로슈푸코의 잠언 "태양이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를 인용하며,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이기게 해 줄뿐만 아니라 유한한 인생을 풍요롭고 의미있게 살도록 이끌어준다고 본다.

운명의 굴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주저앉곤 한다. 실존주의 치료는 이런 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이해하고, 잠재성을 믿으라 권한다. 우리의 삶이 실존적 공허나 삶의 무의미성에 둘러 쌓인 것도 사실이지만, 작게 불어오는 바람과 창틀 밑에 내려앉은 달빛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인간 조건 비극 속에서 어떤 구원이 있다면, 시지프스와는 다르게 우리는 여러 존재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삶의 하찮음과 열정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행자라는 것을 깨닫고 의지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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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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