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시 쓸 때까지] 00. 그냥 그렇게 됐어!

글 입력 2019.03.20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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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다시 쓸 때까지]

00. 그냥 그렇게 됐어!

글. 김해서



지난달, 개인 SNS를 통해 시를 잠시 중단해야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당시 몇몇 지인들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우려를 표했는데, 내가 꽤 오랜 세월을 시인 지망생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결심은 아직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습작도 하지 않고 시집을 사서 읽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별거(?)의 기간이 슬프지도 않다. 물론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였던 시를 굳이 멀리한다는 게 매우 어색하고 불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시를 열심히 쓰던 순간에도 불안은 늘 친근했다. '이러다 시인이 될 수 없는 건 아니겠지?'

시인 지망생 김해서가 아닌, 시를 제외한 김해서를 마주하는 나날들. 시집을 덮고 각종 문학상 공모 기한을 확인하는 일을 멈췄다. 수년을 반복적으로 해 온 일을 그냥 멈춰버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모든 게 평온하고 순조로웠다. 한 달 사이에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밀린 소설책들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필름 카메라를 구입하고, 독립잡지 <하이드어웨이 매거진> 2호 기획 회의를 진전시키고, 아트인사이트 에세이 연재를 시작하게 되고, 벌써 필름 3롤이 채워져 첫 현상소를 알아보고 있다.

시를 쓰지 않아서 벌어진 일은 없었다. 퇴고 및 공모를 위한 프린트 비용이 줄었다는 것 정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허탈하고 아름다웠다. '시'가 아니어도 내게 일상이 있구나. '시'가 아니어도 '나'를 담을 수 있는 일들은 많구나. '시'가 아니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뀌는 건 아니구나. 이 일상이 나를 '시'로 다시 데려다줄 수 있겠구나 하는 옅은 희망마저 일어난다. 고백하자면, 볕 좋은 며칠간 사진을 찍으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밑줄 그으며 읽으면서, 아트인사이트 에세이 기획을 하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시 쓰는 김해서'를 억누르려 부단히 노력했다.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을 땐 핸드폰 메모장에 단편적인 표현들을 슬쩍 나열해 보기도 했다.

'굳이 안 쓸 것까진 없고 쓰고 싶을 때 써서 조금씩 모아두는 게 어때?' 아빠의 말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던 것 같다. '괜찮아. 다시 쓰게 될 거라는 걸 잘 알아.' 다시 쓰기 위해서 쓰지 않는 시간. 시가 없어도 하루하루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아무 탈 없이 시를 중단할 수 있다는 건, 나의 시 쓰기에 어떠한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겠지. 시는 그 자체로 두고 봤을 때 가장 의미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시는 고정된 텍스트 작품이라기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의식이나 행위에 가깝기도 하다. 아름답지만 무용한 읊조림.

아빠에게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처럼, 내가 언젠가 다시 그 '무용한 읊조림'을 이어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몇 주, 몇 개월, 몇 년이 흐를지 모르겠으나 역시나 그날의 시 쓰기에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감격에 겨워하며 연필을 쥐거나 심장을 부여잡으며 노트북 앞에 앉지도 않을 것이고 동네방네 자랑하듯 알리지도 않겠지. 누가 왜 다시 쓰게 됐냐고 물어보면 '그냥 그렇게 됐어!'라고 말해야겠다고 미리 대답도 준비해 뒀다. 더는 '죽기 살기'로 시에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죽어도 살아도, 상관없이 쓰겠다는 마음으로 일기처럼 일상에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바다'라는 단어를 쓰면 파도의 짠물이 얼굴에 튀는 것 같고, '죽'이라는 단어를 쓰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사실 난 그게 좋았을 뿐이다. 깊게 돌보지 않아도 싹이 났고 깊게 돌보면 꽃과 과일까지 안겨주는 신비한 작은 숲. 시를 다시 쓸 때까지, 그 숲이 그리워질 만큼 일상을 깊숙이 모험하기로 했다. 이 에세이는 시를 떠나온 내 도피처, 시의 이웃 나라에서의 기록이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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