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베트남에서 한 달 살기 (3) [여행]

내가 정의하는 나만의 여행
글 입력 2019.03.21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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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의하는 나만의 여행
베트남에서 한 달 살기, 그 여정의 끝 : 기억하기


호치민에서 보낸 따뜻한 겨울은 나로 하여금 편안히 쉬게 했다. 거스른 계절만큼 쉴 틈이 생기니,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둘러보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을 갈무리 할 때쯤에서야 비로소 내가 살아 본 베트남을 내 나름대로 정의해볼 수 있었다. '정의'라는 것이 때로는 거창하거나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내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기 위해서 정의만큼 효과적인 건 없는 듯하다.



#향을 피우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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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동자상


한 달 살이를 하면서 다채로운 색감 만큼 나를 흥미롭게 한 것은 '향' 냄새였다. 호텔을 비롯한 숙박시설, 음식점, 조그마한 소품 가게와 옷 가게부터 복합 쇼핑몰까지 다양한 상점들, 심지어 클럽까지 웬만한 상업적 공간에는 향을 피우고 있었다.
  
그랩(Grab. 교통 혹은 배달과 관련된 어플리케이션의 이름이자 교통수단 / 우버(Uber)나 한국의 카카오택시와 비슷하다)을 타보면, 열 중 다섯은 앞쪽에 동자상이나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걸 보고, 세 번은 십자가나 마리아상을 보고, 나머지 두 번은 동물이나 캐릭터 장식 혹은 아무것도 놓여져 있지 않은 걸 보게 된다.

베트남과 인접한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불교가 국교이면서 불교신자가 절대 다수이지만, 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인구의 4~50%라고 한다.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35%라고 하지만, 지배적인 생활양식이나 정서는 불교에 기반한 듯 했다.



#진짜 배달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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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랩 기사들(왼쪽)
배달의 민족으로 살아가게 하는 오토바이(오른쪽)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대형마트나 주요 상가 주차장에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이 있을 만큼 베트남의 주요 교통수단은 단연코 오토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토바이가 많고,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으니 관련된 배달산업도 활발하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랩이라는 어플리케이션이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우선 길거리에 누가봐도 그랩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택시와 오토바이가 즐비하다. 카페에는 자신이 마실 걸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랩 헬멧을 쓰고 주문을 하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어진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랩은 이미 일상의 한 부분이 된 듯 했다.

단순히 운송수단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Grab Food로 음식을 저렴하게 배달할 수도 있다. 커피 한 잔도 그랩으로 배달시킬 수 있는 베트남을 보면서, 진짜 배달의 민족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쌀국수 맛집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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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에서의 마지막 쌀국수(왼쪽)
어딜가던지 늘 옳은 짜다(오른쪽)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에 제일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쌀국수 많이 먹겠네~" 였다. 가히 쌀국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쌀국수는 일상이며 쌀국수집이 한국의 편의점보다도 많은 것 같았다.

한국으로 치면 같은 국밥집이라도 육수나 재료의 맛이라던지 반찬 등의 차림이 조금씩 다르듯이, 쌀국수도 가게마다 육수에 들어가는 향신료, 면의 굵기와 길이, 한 그릇의 양, 필수 혹은 옵션인 고수까지 모두 제각각이어서 개성만점이었다.

찾아다니고, 비교해보며 먹어보는 재미를 확실히 느꼈지만, 애석하게도 호치민에서 먹은 쌀국수 중에 내 입맛에 맞는 건 떠나기 전날 먹은 쌀국수 뿐이었다.

현지인에게 추천받아서 가보고, 동네 맛집일 것 같아 보여서 가보고, 일단 무작정 들어가서 먹어보고,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가보고, 이미 한국인들에게 입소문 났다고 해서 가보고, 길거리에서도 먹어보는 등 여러 곳에서 쌀국수를 먹어봤지만 대개 삼계탕에서 맡아볼 법한 향이 나고, 한국에서 먹어온 쌀국수에 비해 면이 얇았다.

피자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한국의 더블크러스트 피자를 그리워 했다는 친구의 말처럼 나는 쌀국수의 나라에서 노량진과 합정의 쌀국수를 그리워했다.

아쉬움이 들면서도 계속 먹을 수 밖에 없던 이유는 한 그릇에 한화 3,000원이 안 되는 착한 가격과 어느 가게를 가던 맛있는 짜다(한국의 둥글레 차나 보리차 같이 보통 식당에서 판매하는 차 종류) 때문이었다.



#한 달 살이가 가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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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즐긴 다양한 먹거리


호치민 혹은 베트남의 다른 섬이나 도시뿐만 아니라 세계 이곳저곳 한 달 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한 달 살이 관련된 정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달 살이를 하고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지의 독특한 문화를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하지만 호치민도 도시인 만큼 어디를 가나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면서 느끼고 누려왔던 것을 호치민에서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호치민에서 먹었던 것 중에 제일 맛있었던 건 베트남 음식이 아니었다. 물론 현지의 음식을 최대한 많이 먹으려 했다. 그렇지만 사케동 정식이 맛있는 일식집, 부라타치즈가 끝장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이태원보다 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멕시칸 전문 음식점, 어묵이 살아있는 한국 떡볶이 체인점까지! 이미 맛집으로 유명해진 음식점들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요리의 재료나 맛, 서비스 문화가 나름의 현지화를 거치기도 했지만, 장인이 도구를 가리지 않듯이 진정한 맛집은 장소와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맛을 낸다. 이렇게 관광객들을 타겟으로 삼은 세계 여러 나라의 식당들이 많은 덕분에 어느 도시든 한 달 살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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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아 기분이 좋았던 날,
호치민 인민위원회 청사(호치민 시청) 앞에서


한 달 동안 호치민에 살아오며 생각하고 느낀 것을 추려보니, 참 잘 먹고 돌아다니긴 했다. 하루를 빨리 시작하고 아침부터 부지런한 베트남 사람들을 본받아 아침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현지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었고, 또 먹은 만큼 열심히 돌아다니고 둘러보았다.

또 어느 날은 '여기가 한국도 아닌데, 열심히 살지 않겠어!' 하며 긴장하지 않고, 한국이었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정말 대충 살기도 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 어느 노랫말처럼 열심히 돌아다니면 돌아다닌 만큼, 대충 하루를 보내면 또 그만큼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따뜻한 겨울은 난생처음이라 호치민에 있는 동안 귤이 그렇게나 그리웠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귤을 먹을 땐, 생각만큼 맛있지 않았다. 귤을 좋아해서 그리워한 것보다 으레 1월이면 먹었다는 그 익숙한 사실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겨울이면 귤을 먹는다'라는 것처럼 너무 익숙해져서 어느 순간부터 '이게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표현하는 게 참 많다. 한 달 살이를 하고 돌아온 뒤의 한국 생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이 자연스러움이 또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질 때, 나는 또 떠날 수 있을까?

익숙한 것과 낯선 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떠난 호치민에서의 한 달 살이는 내게 쉼표였다. 무미건조할 것도, 그렇다고 의미가 마구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 쉼표라서 감사했다. 어느 날은 혼자 광장을 산책하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데, 문득 '그래도 나 잘살아왔구나' 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 무언의 힘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런대로 의미 있는 쉼표가 준 선물이구나 싶으면서 동시에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한 달 살이라는 쉼표를 쓴 게 다행이고, 또 행운이라고 여겼다. 숨을 잘 고르고 돌아왔으니, 남은 20대는 이따금씩 이 쉼표를 떠올리며 담담히 살아가려 한다.


[이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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