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뒤샹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3.2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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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 중인 《마르셀 뒤샹 展》에 대한 오피니언을 기고했다. ‘레디메이드’ 기법에 담긴 뒤샹의 혁명적 정신에 주목하여 ‘반예술’이라는 집약적 단어로 전시의 전체적인 맥락을 해석했고, 그 외에도 시각적 착란을 일으키며 미술에 있어 망막에의 의존에 의문을 제기한 ‘항망막 예술’, 젠더 개념에 균열을 낸 여성 자아 ‘에로즈 셀라비’, 관객에게 작품 해석의 주도권을 부여한 ‘에탕 도네’ 등의 개념 및 작품으로 기존의 예술관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한 그의 작품세계에 집중하여 감상을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관람을 마친 후 미술관 측에서 별도로 진행한 ‘레디메이드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목격한 것이 마치 반예술 정신의 현현을 목격하는 것 같아 인상적인 마무리로 기억되었고, 다양하고 역동적인 전시 방식 역시 다각적인 감상을 도왔다는 점에서 전시 자체가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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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대표작인 ‘샘’이 사실 여성 예술가의 것을 훔친 것이라는 가설을 마주한 지는 오피니언을 기고한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서였다. 우연히 가설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충격에 빠져 관련 자료를 찾아본 결과 심지어 미술계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가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뒤샹이 가부장적 폭력과 여성을 향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명망 높은 미술 수집가로서의 업적을 남긴 페기 구겐하임의 적극적인 조력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든 발걸음이 (특히 젠더적인 부분에서) 진보적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전시를 해석했기 때문에, 뭔가가 제대로 뒤집힌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가설은 뒤샹이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속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R.Mutt’라는 익명을 쓰는 여성 친구가 뒤샹 자신에게 소변기를 조각품으로써 보냈다는 내용이다. 가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 여성으로 ‘Elsa von Freytag-Loringhoven(이하 엘사)’라는 다다 예술가를 지목하는데, 그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 사물에서 예술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품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그의 재치 있고 거친 작품 세계가 뒤샹보다 ‘샘’과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또한 뒤샹이 ‘샘’의 소변기를 산 곳이라며 주장한 업체에서 해당 모델을 판매하지 않았던 것이 밝혀지면서 가설이 증명되는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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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sa von Freytag-Loringhoven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영국 테이트모던은 여성이 소변기를 ‘보냈다(sent)’는 편지 속 문장이 ‘만들었다(made)’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샘’의 창작자가 뒤샹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며, 가설을 뒷받침하는 다른 주장인 작품 세계의 일관성에 관해서도 엘사의 작품 세계 역시 ‘샘’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설인만큼 확증되지 않은 부분이 다소 있으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갑론을박은 계속되고 있다. 아마 더욱 정확한 근거가 등장하기 전까지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샘’으로 대표되는 뒤샹의 작품 세계가 창작자의 진위 여부라는 창작 개념의 근본을 흔드는 논란에 휩싸이면서도 공고한 신화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뒤샹은 지금까지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그가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 개념미술은 미술계의 판도 자체를 바꿔놓은 아이디어로 자리한다. 뒤샹에 대해 제기된 수많은 의문과 가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의 신화는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었는가. 그 신화를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인가.

관련 글을 기고한 ‘THE ART NEWSPAPER’에서는 개념미술이 미국의 모더니즘을 촉발시켰다는 집단적 믿음 때문에, 또한 뒤샹에 대한 의심은 곧 모더니즘을 중대한 기반으로 두는 미국의 미술사에 대한 의심이자 국가적 자부심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뒤샹에 대한 의존이 거둬질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그 이유로 제기하였다. 이에 따르면 뒤샹의 반예술은 기득권에 반(反)하는 것이 본질이자 핵심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학문적·이론적 기득권의 지위를 차지하여 자신에 대한 반박을 차단하고 있는 모순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글에서 예견했던 ‘뒤샹의 혁신이 구습이 되어버릴 미래’의 상당 부분은 이미 실현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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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서구권이 쌓아 올린 미술사가 그 선진성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유색인종 예술가를 성실하게 지우며 그들만의 기득권을 구축하고 차별을 일삼은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비판적으로 생각된다. ‘샘’의 창작자 진위 여부를 떠나 그 여부에 대한 의심이 학계에 널리 퍼져있음에도, 그 의심이 사조의 근본 자체를 부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믿음이 신화와 같이 유지되고 있는 곳을 과연 다원적이고 진보적인 공론장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배제되고 지워지는 수많은 이름들에게도 그 곳은 정당한 곳인가?

뒤샹, 혹은 뒤샹에 대한 믿음을 비호하는 지금의 예술계가 과거에도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불평등을 작동시켰다면 남성이 여성의 작품을 훔쳐서 자신의 것인 체 발표하는 상황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득권에 저항했기에 의미 있었던 뒤샹의 전위적 정신은 사실 그가 백인 남성이라는 무엇보다 공고한 기득권에 속했기에 세상 밖으로 발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젠더 개념의 균열이 아닌 고착


이전 글에서는 진실과 거짓 혹은 예술과 반예술을 다루는 뒤샹 미술의 핵심이 ‘전복’에 있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을 다루는 그의 방식 역시 같은 맥락에서 기존의 젠더 구분을 무너뜨리는 파격으로 판단했다면, 이제 그의 전복이 실재했는지조차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를 더욱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가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린 ‘L.H.O.O.Q’에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라는 외설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과 두꺼운 화장과 모피 코트를 입은 ‘에로즈 셀라비’를 여성 자아로 내세운 것, ‘에탕 도네’를 통해 여성의 나체를 관음증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 것은 기존의 젠더 개념에 균열을 일으킨 진보였을까. 혹은 결론적으로 기존의 여성상과 젠더 구분을 고착시킨 외양만 파격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뒤샹이 ‘에로즈 셀라비’로서의 모습을 담은 ‘벨 알렌’이라는 오브제가 함의하는 풍자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젠더 개념이 결국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피력한다. 뒤샹은 이 오브제를 통해 백인이 되길 바랐던 흑인 여성을 풍자하며 여성이 되길 바라는 남성 자신의 모습을 동일 선상에 놓는데, 바꿀 수 없는 인종을 바꾸려는 개인을 풍자하는 의도였다면 인종의 구분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자신이 투영한 젠더의 구분 역시 강화하는 것이므로 젠더 개념의 진보 혹은 해방으로 해석될 수 없으며, 인종 혹은 젠더의 구분 자체의 허구성을 강조하는 의도였다 해도 흑인이 백인이 되길 바라는 것과 남성이 여성이 되길 바라는 것은 정치학적으로 같은 방향성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실패한 풍자라는 것이다. 더불어 여성 자아를 두꺼운 화장과 모피 코트로 표현한 것 역시 남성 중심 사회 속 여성상의 일환이라는 비판 역시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L.H.O.O.Q’나 ‘에탕 도네’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방식 역시 문제시되고 있다. 여성을 성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파격이자 전위로 해석되는 두 작품은 그러나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권위적 미술계에 도전장을 내밀든, 나무 판자에 뚫린 구멍을 통해 관객의 주체적 감상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이든 그것이 사실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 이뤄질 필요는 없다. 그럴 권리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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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해야만 한다


물론 시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과거에 진보라고 생각되었던 것을 미래인 지금에 와서 퇴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 못하겠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맞아도 그 근본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것을 진보로 판단한 당시의 사회적 잣대에 대해서도 쉽게 잘잘못을 판단 내리기 어렵다. 또한 뒤샹의 혐의가 사실이라 해도, 항망막 예술 등을 통해 관객에게 주체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진보적인 예술가다. 다만 그의 예술이 아무리 파격적이고 전위적이었어도 결국 기득권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였다는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불평등 구조의 지배자, 더 나아가 가해자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그가 여성 예술가의 이름을 지웠다는 추측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뒤샹은 수많은 논란에도 여전히 그 지위가 굳건한 ‘현대미술의 아버지’이다.

지난 글에서 미술관이 기획한 ‘레디메이드 만들기’ 프로그램이 레디메이드가 함의하는 전위 정신을 대표하는 최고의 마무리라고 밝힌 이유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진일보한 예술관의 본질을 담아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시를 집약하는 좋은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모두가 해야만 한다’라는 새로운 시대의 제언이 필요하다.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그 통찰의 결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예술가의 책임에 대해 간과한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미술관 역시 문서 아카이브와 영상 매체를 폭넓게 활용하며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람 방식을 유도했지만 에로즈 셀라비를 ‘여성스럽다’고밖에 묘사하지 못한 것은 당시의 파격마저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현재를 자각해야 하는 현대 미술인의 책임을 경시한 것이다.

뒤샹이 ‘샘’을 훔쳤다는 가설은 사실 놀라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성이 주류이며 여성은 지워지는 구조는 꾸준했고, 그 기반은 너무나 오랫동안 단단하게 구축되어 균열을 내기 어려울 것이며, 뒤샹에 대한 가설이 사실이라고 밝혀진다 해도 그의 명예는 쉽게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추측이며 동시에 시대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는 진실에 대한 간과와 무책임이 난무하는 현 상황에서 더욱 견고해진다. 설사 ‘샘’이 엘사의 작품이 아니라 해도 또 다른 엘사가 얼마든지 나타나고 또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뒤샹의 반예술 정신이 정말 그의 것이라면,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를 둘러쌌던 세계를 끊임없이 비판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선 지금, 그의 파격은 더 이상 파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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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Did Marcel Duchamp steal Elsa’s urinal?', THE ART NEWSPAPER
'Was Marcel Duchamp's 'Fountain' actually created by a long-forgotten pioneering feminist?', Independent
‘Marcel Duchamp, Fountain’, 테이트모던
'정체성이라는 문제', 씨네21-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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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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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프위의포뇨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현대미술가 중에선 그래도 뒤샹을 참 좋아하는데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아가네요. 원색적인 비난이나 옹호가 아닌, 균형잡힌 시각에서 글을 쓰신 점이 참 좋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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