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히피 로드] 볼리비아 – 살아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글 입력 2019.03.2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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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 살아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글 - 여행작가 노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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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여행을 하고, 여행은 인간을 만들어 냈다. 여행이 만든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처, 예수, 공자 등 성인(聖人)들 외에도 바이런, 다윈, 헤밍웨이, 에릭 호퍼처럼 시인, 박물학자, 소설가, 철학자 등 인물군은 다양하다. 그리고 여행은, 혁명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샤르트르가 극찬했던 이 혁명가는 첫 번째 남아메리카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고 말했다.


셀리아가 낳은 첫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2살 되던 해부터 천식을 앓았다.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을 겪을 때마다 어미는 대신 앓아줄 수 없다는 아픔을 느꼈다. 맑은 공기를 찾아서 이사를 다닌 덕분일까, 아들은 건강하게 자랐다. 독서와 더불어 럭비, 수영 등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아들이었다.


스물세 살이 되자 아들은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떠났다. 아르헨티나를 벗어나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아들은 틈틈이 편지를 보내왔다. 떠날 때만 해도 다른 나라에 간다는 생각에 설레기만 했던 아들이 점점 진지해졌다. 그리고 아들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땐, 더 이상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다.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들은 안락한 삶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곤 불의한 권력에 대항해 총을 들고 싸우는 무장혁명가가 되었다. 쿠바 혁명에 동참해 성공한 아들이 쿠바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이 무사했으므로 어머니는 안도할 수 있었다. 6년 후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좋은 옷, 맛있는 음식, 따뜻한 잠자리를 뒤로 한 채 아들은 볼리비아의 산으로 들어갔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작정이었다. 산으로 들어간 지 2년, 아들은 적에게 붙잡혀 산골 학교에서 총살당했다. 적들은 시신을 도시로 옮기고 병원 세탁대 위에 전시했다. 눈을 뜬 채 죽어 있는 시신을 한 사진사가 촬영했다. 사진이 전 세계로 퍼졌고 사진을 본 사람들 중 혹자는 ‘20세기의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들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세르나. 사람들은 체 게바라(Che Guevara)라고 부른다.


체(Che – 아르헨티나의 관용어로 친구를 뜻한다)가 사살된 외딴 산골 마을은 볼리비아의 안데스 산맥 동쪽 끝자락에 있다. 라 이게라. 무화과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먼저 바예그란데(해발 2천 미터)로 갔다. 바예그란데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후 라 이게라로 가는 교통편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대중교통편이 없었다. 결국 숙소를 잡은 뒤 묻고 물어 <루타 델 체 Ruta del Che>를 안내하는 여행사를 찾아냈다. 여행사 직원 페르난도는 ‘체의 길’을 오가는 데 10시간 넘게 소요된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떠나기로 하고 여행사를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 문을 나서자 페르난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사 전용차량과 기사가 올 줄 알았는데 차량은 앞 유리창이 뚫린 고물차에 페르난도 본인이 운전수라고 했다. 라 이게라로 가는 방문자가 적어서 그때그때 차를 렌트하는 식이라고 했다. 교외로 벗어나자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앞 트럭이 튕긴 돌멩이가 유리창에 수시로 부딪혔다. 이미 몇 군데 깨져 때운 자국이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흔적 같았다. 마치 전장을 지나는 종군기자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4월이었다. 볼리비아에선 가을에 해당하는 계절. 노란 꽃들이 좌우로 만발한 길을 지나자 농가가 나왔다. 페르난도가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요.” 사유지라 땅주인에게 허락을 구했다. 주인은 순박한 농부였다. “올라!” 인사를 건네자 환하게 웃으며 마당 옆의 샛길을 가리켰다. 내리막으로 이어지다가 앞이 확 트인 공터가 나왔다. 페르난도가 손가락을 들어 바위 사이의 계곡을 가리켰다. - 저기가 추로 계곡입니다. 체가 정부군에게 쫒기다가 격전을 치른 곳이죠. 개울에서 체의 부대원 치노가 안경을 떨어뜨렸고, 앞이 보이지 않는 치노를 체가 도와주려다가 정부군이 쏜 총에 맞아 포로가 되고 말았죠. CIA가 개입하면서 체는 재판도 없이 다음날 사살되었어요. 여기서 좀 더 내려가면 빈 농막이 나올 겁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데 그 집 주인은 게릴라들을 만난 적이 여러 번 있다고 했어요. 감자, 옥수수 같은 식량을 얻어가며 농사를 도와주던 사람들이었다고 하더군요.


오솔길을 지나 개울에 닿았다. 체가 총에 맞아 쓰러졌던 자리였다. 부상당한 몸을 숨겼던 나무와 바위. 순간, 나는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버둥거리는 한 사내를 마주한 것 같은 환영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 올랐다. 체에게 묻고 싶었다. 쿠바혁명에 성공한 후 그대로 남았다면 고통스럽게 죽는 일은 없지 않았겠냐고,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게릴라로 돌아간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냐고.


라 이게라 마을은 번듯하진 않지만 그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임을 나타내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곳곳에 초상화가 가득했다. 그를 가뒀던 학교 교실로 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들어갈 순 없나요?” 페르난도에게 묻자 기다리라며 사라졌다. 잠시 후 페르난도는 열쇠를 든 아주머니를 모시고 왔다. 철컥. 문이 열렸다. 흙바닥의 교실. 체가 묶여 있었던 걸로 짐작되는 나무의자. 교실 벽엔 당시 정부군이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산발한 채 포승줄에 묶여있는 체..


준비해간 쿠바산 시가(Cigar)에 불을 붙였다. 체는 시가를 무척 좋아했다. 전장에서도, UN에서 연설을 할 때도, 안데스 산맥에서도 늘 시가를 물고 있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체의 초상화 위에 시가를 내려놓았다. 시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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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내가 왜 다시 길을 떠났냐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인터뷰. 모든 기록 속엔 내 삶을 관통하는 두 갈래 욕망이 들어있어. 나의 욕망, 나의 열정. 그건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과 ‘방랑에 대한 욕망’이었어. 난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그곳에 머물러야 하고, 방랑자가 된다면 불의한 사회를 방관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지. 사회변혁과 방랑, 혁명가와 방랑자. 두 개의 욕망과 열정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방법이, 내겐 게릴라의 길이었던 거야.”


체가 쿠바로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두 명의 나. 그것은 청년기의 체를 잠깐 스치고 지나간 상념이 아니라 체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싸움이었다.


어머니, 마음만 먹으면 저는 과테말라에서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곳에서 병원을 차려 알레르기를 치료한다면 말이죠.(이곳엔 코맹맹이 환자들이 정말 많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내 안에서 싸우는 두 명의 나. ‘사회개혁가’와 ‘여행자’ 둘 다 배신하는 끔찍한 일이 될 겁니다.


바예그란데로 돌아온 건, 해가 지고 나서였다. 다음날 아침 세뇨르 데 말타(Senor de Marta) 병원으로 갔다. 이곳에서 찍힌 사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 <게릴라의 죽음> 같은 제목을 달고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셀리아가 세상을 이미 떠난 후였으니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세상의 수많은 아픔과 고통 중 자신이 낳은 아이가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처럼 큰 고통이 있을까? 체의 시신은 비밀리에 바예그란데 비행장에 묻혔고, 30년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었다. 세뇨르 데 말타 병원의 세탁대 위엔 전 세계 사람들이 남기고 간 추모의 글귀와 꽃이 놓여 있었다. 체가 최후를 맞았던 라 이게라에선 시가를 바쳤는데, 세뇨르 데 말타 병원엔 따로 준비해 간 게 없었다.


노란 리본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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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날 때 노란 리본을 낡은 가방에 얹고 왔더랬다. 나는 노란 리본을 나비라고 생각했다. 마추픽추도 보고 싶고, 티티카카 호수에 발도 담그고 싶고, 이구아수 폭포의 물벼락도 미맞고 싶고, 카리브의 섬에서 춤도 추고 팠던 아이가 내 가방 위에 앉아 따라왔다고. 체를 추모하는 세탁대 위에 내려앉은 세월호 리본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나는 속삭였다.


'아이들아, 잠시 쉬어라.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위 글은

<남미 히피 로드>

(2019년 4월 15일 발간)의 일부입니다.






노동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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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2년간 '장기 체류 후 이동 Long stay & Run'하는 기술을 연마한 후, 한국과 다른 대륙을 2년 주기로 오가며 '장기 체류 후 이동'하는 여행기술을 평생 수련하고 있는 여행가.


EBS세계 테마기행 여행작가. <길 위의 칸타빌레>,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길 위에서 책을 만나다>,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남아메리카를 떠돌며 전직 방랑자였거나 현직 방랑자인 자매, 형제들과 어울려 보낸 800일간의 기억. 방랑의 대륙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가 건져 올린, 사금파리 같은 이야기를 당신 앞에 내려놓는다.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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