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젤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책 '젤다' 리뷰
글 입력 2019.03.24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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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 피츠제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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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 피츠제럴드는 '젤다'라는 이름보다 '피츠제럴드'라는 성으로 더 익숙하다. 그의 남편이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의 호황기인 '재즈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짧은 전성기를 누린 후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으나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검색해 봤더니 젤다 피츠제럴드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스콧의 뮤즈이면서 동시에 사치를 일삼고 정신질환을 앓으며 스콧을 파멸로 몰아간 악처라는 평이 많았다. 젤다는 스콧이라는 작가의 서사를 더 극적이게끔 하는 부속품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중심축을 스콧에 두지 않고 젤다에게 두면 많은 게 달리 보인다. 젤다는 여러 단편을 발표한 작가이자 20대 후반에 발레에 입문해 발레단으로부터 정식 입단 제의를 받을 정도로 재능있는 무용수였고 자신의 그림으로 전시회도 열었던 화가였다. 또한 그녀는 재즈시대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여왕이자 악동이었다. 그러나 '젤다' 보다 '피츠제럴드'를 중요시하는 세상에서 그의 작품은 남편과 공저로 발표되었고, 예술적 자질은 정신질환의 부산물로 평가절하되었다.

피츠제럴드라는 성이 지워지고 젤다라는 이름만 온전히 남은 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젤다를 유명작가의 아내이기 이전에 한 명의 독립된 개인으로 보고 그가 생전에 발표했던 단편소설과 산문을 엮었다. 여기에는 스콧과 젤다의 공저로 발표되었거나 스콧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해버린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피츠제럴드를 지우고 나면 동명의 게임이 더 익숙할 정도로 가려진 젤다라는 이름을, 책은 새로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플래퍼는 무엇을 원했을까



게이는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서 낭만이 달아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낭만 때문에 그렇게 죽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좋은 벗이었고 너무나 예뻤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 32쪽


젤다가 쓴 작품을 읽으며 눈에 들어왔던 건 묘사가 많고 배경이 화려하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의 외양은 물론이고 온갖 사치품과 장식품들의 나열에 읽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묘사가 많은 건 당시 소설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게 유난히 화려한 까닭은 젤다가 재즈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일 거다. 재즈시대는 미국에 대공황이 오기 직전, 경제가 가장 부흥했던 1920년대를 일컫는 말로 당시 재즈음악이 유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Girl 시리즈'라 불리는 젤다의 단편소설 다섯 편은 재즈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른바 '플래퍼'다. 모든 것들이 꽃처럼 피어나던 시절, 새롭게 등장한 여성들은 '플래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들은 단발머리에 짧은 스커트를 입은 모습으로 대표되었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을 거부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며 자유연애를 즐겼다. 그들은 흔히 꽃이 묘사되는 방식처럼 대상회되곤 했다. 그 양상은 우리나라가 개화기 때 신여성을 대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자유연애를 추구하기에 누구에게나 허락된 '꽃'으로 찬양받으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언제든 멸시될 수 있는 존재였다. 젤다의 소설은 이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화자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여성이 바라보는 여성은 꽃이 아니라, 복잡하고 입체적인 '사람'이었다.

다섯 편의 소설에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에서는 낭만만을 추구하다 끝내 죽음을 맞이한 여성이, <미스 엘리>에는 전 연인의 자살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기를 택한 여성이 있다. <남부 아가씨>의 여성은 더 나은 곳에서 살고자 했던 자신의 욕망을 달성했고, 반대로 <재능 있는 여자>의 여성은 꿈을 이루려던 순간 결혼이라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욕망, 또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춤을 췄다. 언제나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사람을 찾아다녔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길 바랐고,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 크게 절망했다. 그들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꽃처럼 반짝 피어나던 시대를 살았지만, 꽃이 되기만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을 표출하고자 재즈시대의 풍요로움을 적절히 이용했다.



수많은 젤다를 위하여



플래퍼! 그녀는 이제 나이 들어간다. 그녀는 자신의 플래퍼 신조는 잊고 오직 자신의 플래퍼 자아만을 의식한다. 그녀는 가족 친지의 요란한 환호와 갈채 속에 결혼했다. 그녀는 한때 그녀 앞에 예견됐던 '비참한 최후' 중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다만 마침내 모든 착한 플래퍼들이 가는 곳으로 갔을 뿐이다. 젊은 부부의 세계로, 무료함과 쌓여 가는 인습과 아기를 가지는 기쁨 속으로. 그동안 찬란함과 용감함과 총기는 잠시 삶의 소용에 맡긴 채로. 모든 착한 플래퍼들이 그래야 하듯이.

'플래퍼는 어떻게 되었나?' 134쪽


젤다를 비롯해 젤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플래퍼들은 재즈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성기였던 재즈시대는 너무 짧았다. 젤다의 산문 '플래퍼는 어떻게 되었나?' 에는 플래퍼들도 결국 나이를 먹으면 가정으로 편입되어 얌전히 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내용이 자조적으로 담겨 있다. 그 대목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여성을 읽어낼 수 있다. 플래퍼는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인기를 얻는 차원을 넘어서 온전히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세상을 살고자 했던 여성의 근본적인 욕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자유는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대공황이 찾아오고, 남성도 살아가기 힘든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서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공유한 시대가 얼마나 낭만적이었든, 얼마나 파격적이었든 대부분의 플래퍼는 결국 좁게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넓게는 사회가 정해 놓은 여성의 틀 안에 편입되었다.


여자들은 열에 아홉은 인생을 임종 분위기로-그 분위기가 최후의 발버둥이냐 순교자의 체념이냐의 차이일 뿐-살지만 내일 죽지는 않는다. 그다음날도 죽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쓰라린 최후 중 하나를 맞을 때까지 쭉 살아야 한다. 신경 쓰기도 지겨워질 때까지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빨리 깨달을수록 이혼 법정의 인기도 빨리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플래퍼 예찬', 125쪽


젤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행히 그들 부부가 가진 명성과 부는 젤다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자아를 표출하며 살 수 있게 도왔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한계는 뚜렷했다. 젤다는 제도에 편입되어 전통적인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기에 재능과 자의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결국 젤다는 1930년대부터 조울증에 시달리다 병원에서 화재사고로 죽음을 맞았다. 이후로도 젤다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미디어와 사람들 사이에서 악처로 묘사되어야 했다. 산문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에서 본인의 글을 인용한 남편의 소설에 대해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꽤 편집되어 있지만 편지글들에서도 어쩐지 낯익은 내용이 있고요. 아무래도 피츠제럴드씨는-스펠링 제대로 쓴 것 맞죠?-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라고 뼈있는 농담을 할 때만 해도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기억될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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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다가 그린 'Star of Bethlehem'


1970년대 들어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한 젤다에게, 차라리 지금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말을 나는 쉽게 건네지 못하겠다. 100여년 전과 무관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낭만적이고 욕망에 충실하던 젤다, 욕심 많고 화려하던 젤다가 살아가기에 아직도 세상은 녹록지 않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재능있고 욕심많은 여성은 너무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재능있는 여성에게는 엄격한 도덕률이 늘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며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는 허영심과 사치라는 명목으로 너무 쉽게 단순화된다.

100여년 전 플래퍼들이 원했던 것을 오늘날의 여성도 원한다. 지워지거나 왜곡되지 않기를,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다 펼쳐보이며 살아갈 수 있기를. 젤다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아직도 발견되어야 할 젤다들은 많다. 과거에 국한된 일도 아니다. 여성을 검열하고 멸시하는 사회에서 젤다는 끝없이 변주될 것이다. 그 변주를 막는 것이 오늘날 젤다의 작품을 읽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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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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