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천히, 꾸준하게' 인생이 주렁주렁 영글려면 [영화]

자연을 따르는 삶의 미학, 영화 <인생 후르츠>
글 입력 2019.03.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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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생 후르츠>

Life Is Fruity



짙은 흙냄새를 맡았다. 학교 운동장과 아파트 놀이터 같은 곳에선 절대로 맡을 수 없는 향. 색이 검고 자잘한 돌과 이파리가 적절히 어울린 흙냄새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연의 근원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 향을 맡은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식물을 본 지는 더욱 오래됐다. 아파트 ‘경관’에 어우러지게 심은 것과, 근교 데이트 코스로 만든 ‘수목원’에 있는 것을 제외하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머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영화 <인생 후르츠>의 우아함은 자연과 그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사는 '집'에서 시작된다.

츠바타 슈이치씨는 90세로, 직업은 건축가다. 젊은 시절, 아츠기 기지에 온 맥아더 장군과 전쟁으로 불 탄 210만 채의 주택을 봤다. 1959년엔 ‘이세 만 태풍’으로 사라진 5천 명과 그 집을 봤다. 정부의 주택 재건 사업에 참여한 슈이치 씨는 ‘인간은 어디에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슈이치씨에게 정부의 아파트 계획은 비인간적이었다. ‘고조지 뉴타운‘ 사업에 참여했지만,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조급증으로 만든 획일화된 집은 그의 신념과 부딪혔다. “도시계획자들은 도시를 계획해 놓고 ’프로‘라는 이름으로 다른 곳으로 떠나지요.” 어디에 자기 집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 단순히 ’일‘이라며 기계적으로 짓고 떠나는 건축가들…. 같은 건축가에게 보인 실망감 때문인지, 그는 고조지 뉴타운을 떠나지 않고 밀어버린 땅 300평을 사들인다.

슈이치씨는 그 벌거숭이 벌판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땅에 작은 숲을 만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마을이 숲이 되면, 커다란 숲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집은 자기배려의 윤리와 공동체의 윤리가 스며들어 있어야 함을 입증하고 싶던 슈이치씨의 선택은 40년 뒤 죽는 날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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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타 히데코씨는 87세로 슈이치씨의 부인이다. 집의 살림은 그가 도맡아서 한다. 단 15평에서 살아도 여느 살림이 그렇듯, 히데코씨의 일상은 무시할 수 없이 바쁘다. 정원에 심은 채소 70종, 과일 50종을 보살피고 거둬들인 작물로 요리까지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돈을 물려줄 수는 없지만 좋은 흙을 만들어주면 작물은 누구든 만들 수 있잖아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장소를 전해주는 것은 중요하니까요. 하나코(손녀) 세대에게도 좀 더 좋은 흙을 줘야지요.” 그가 부지런히 집을 가꾸는 이유는 좋은 집 하나 마련해서 부를 쌓고자 함이 아니다. 나고 자람, 죽음의 역사를 아는 이에게 집은 과시의 수단이 아닌 생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기를 수 없는 생선은 단골 가게에서 사 먹는다. 히데코는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본 적이 없다. 사람을 믿고 음식을 사기 때문이다. 잘 먹은 생선에 대한 답례는 그림과 짤막한 글을 적은 엽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에 인격성이 제거됐지만 부부는 ‘돈’ 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신념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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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삶은 우리 사회의 노인과 상당히 판이하다. 둘은 주체다. 슈이치씨의 연금은 32만 엔(327만 원)이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노후준비가 안 돼 노인빈곤율이 높은 우리 사회와 달리, 둘의 노후는 경제적으로 탄탄하다. 비단 그들이 부자여서가 아니다. 오래전 슬로우 라이프로 전환한 부부가 고립되고 배제 당한 삶을 살지 않는 건 사회적 보장 덕분이지 않을까.

일본 고령자의 주 소득은 공적 연금에서 나오는 반면, 한국 고령자의 주 소득 자녀나 친척 지원에서 나온다. 젊은 시절 자식에게 돈을 베팅해 투자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기대며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노인은 소외당하기 마련이다. 임금을 책정 받지 못한 전업주부로 산 노인은 더 위험하다. "열심히 한다는 건 자기 삶을 끝까지 이어나간다는 것"이라는 말이 사회에 우아하게 전달되려면 삶을 영유할 사회적 보장이 필요하다.

"여보, 스스로 꾸준히 하는 거야. 꾸준히 무언가를 하다 보면 여러 일이 점점 보이거든요."라고 말한 히데코씨의 삶은, 슈이치씨의 죽음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태풍 때문에 나무가 쓰러져도 아끼는 물건이 깨져도 좌절하지 않는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자신의 인생을 가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하루아침에 여물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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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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