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창비 182호 소설 ; 외로움에 주목하기 [도서]

<창작과비평 182호>를 읽고
글 입력 2019.03.23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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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일들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 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 창작과 비평 182호, 「일년』 中



『창작과 비평 182호』에 실린 세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은 등장인물 간의 애매한 관계를 바탕으로 느껴질 수 있는 외로움을 신선하게 표현한다. 인물들이 애매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적당히' 아는 사이라는 데에 있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사촌, 회사 선후배, 옛 애인 등과 같이 서로를 딱 어렴풋이 정도로 알 범직하다. 완전히 가깝지는 않으면서도, 전혀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간극. 외로움은 그곳에서부터 읽힌다.

그러나 외로움이 단순히 등장인물들 간에 생각이나 대화가 삐걱대기 때문에 생긴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오히려 적당히 알고 지내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이야기를 오갈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소설에서는 글 위에 표면적으로 외로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인물들이 오랜 터울을 털어내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히는 시점을 마지막에 표현하면서 외로움을 부각한다.


*


박민정의 「나의 사촌 리사」는 일상에서 지나칠 수 있는 외로움을 거론한다. 소설 작가인 나는 자신의 사촌인 리사의 이야기를 쓰려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도쿄에 간다. 한때 메가미라는 3인조 그룹의 리드보컬로 활동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그녀지만, 리사는 그룹이 해체되고 술집 종업원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나는 어릴 적 이미 아이돌로 꿈과 명예를 얻은 리사가 몰락해 버린 걸 수긍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어릴 적 롤모델이 이제는 소설가의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보고 되레 동경하고 있으니 감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리사의 몰락과 함께 내가 언제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부분이 있다. 그중 중요한 순간으로 리사가 메가미 활동으로 JR 동노조 파업 현장에 공연을 간 게 있다. 실제로 나는 리사의 방에서 JR동노조라는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를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도쿄에서의 밤이 끝나갈 무렵, 인기 절정의 아이돌이 왜 파업 현장에서 공연을 했는지를 묻는다. "야스꼬상 / 야스꼬상? / 동노조 조합원인데, 언제나 많이 외로우셔……"(133면)이라고 오가는 나와 리사의 대화는 앞서 언급한 이야기와 함께 사회적 '을'에 놓인 인물들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을 환기한다.



2004년 상반기에 춘투의 무대에서 노래하는 메가미에게 테러가 있었어. 악질적인 놈이 무대에 뛰어올라와 하루미상의 몸을 더듬은 거야. 우린 그 후로 동노조 집회에 나가지 않았어. 물론 그놈 역시 조합원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저씨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야스꼬상은 그때 우릴 지켜준 분들 중 하나야.

(…)

나는 리사에게 물었다.

- 메가미는 왜 동노조 집회에서 공연을 했던 거야?

리사는 짧게 대답했다.

- 우리는 노조의 아이돌이었으니까. 그분들이 원했으니까.


- 창작과 비평 182호, 나의 사촌 리사 中



이것을 두고 작가는 단순히 그들의 서로의 처지를 공감했다고 정리하지 않는다. '그 후로 동노조 집회에 가지 않은 것'은 결국 공간을 통한 유대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서로가 상대방을 헤아려주는 마음은 이해했으나, 그 이상으로 다가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리사는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간 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활동과 JR 동노조 사건을 '지금' 나에게 한다. 지금은 과거의 이야기와는 단절되어 있다. '공감'할 수는 있었으나, 끝내 '이해'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암시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진짜로 상대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 주체는 다른 무엇의 주체이기 전에 먼저 자기 삶의 주체"(24면)라는 한기욱의 말처럼 소설에서도 사건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같은 회사의 인턴과의 짧은 만남을 표현한 박선우의 「휘는 빛」은 그런 면에서 나와 타인이 동일한 업무 공간을 공유했음에도 느끼는 외로움의 논의를 확장한다.






이 소설은 「나의 사촌 리사」와는 달리 우연한 계기로 어색한 관계로 놓인 두 인물이 재회할 가능성을 얻는다. 주인공인 이경은 인턴을 할 때 회사 선배였던 지수의 안부를 묻고자 했던 장문의 메일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경은 "오래지 않아 회사를 떠날 것이고 이후에도 딱히 회사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을 것"(144면)은 인물로, 적당한 친분을 가진 지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지수는 강부장과 불륜을 하다가 그의 아이을 가진다. 그리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강부장에게 화를 낸 지수는 이후 인턴 임기가 만료된 이경과 자연스레 소식이 끊긴다.

이경은 한때 불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지수에게 "응원한다"라고 건넨 말이 무심결에 폭력적으로 건넬 수 있는 "얼마만큼의 책임감으로 건네야 하는 말"(147면) 임을 인지한다. "지수에 대한 질문을 건네지"도 않고 떠난 자신을 두고 "어째서 부끄러운가"라며 자조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건넨 폭력의 정도를 환기한다. 또한 그러한 폭력은 적당한 관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고, 그렇기에 각자에게 상처가 되어 '외로움'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작품은 두 인물이 완전히 '외로움'을 해소했는지를 답하지 않는다. 다만, 회신 메일로 받게 된 지수의 본심을 보여주면서 가능성의 여지를 남긴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소설의 줄거리는 메일이라는 아날로그 형식으로 등장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덕분에 「휘는 빛」은 주체가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을 다시 확인하고 이를 해소할 수 있을 실마리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메일에서 그녀는 당시 자신이 겪었던 감정과 지금 느끼고 있는 각오에 관하여 적는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면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면서 태양 뒤편에 가려져 있던 별들을 볼 수 있다고 하지. (…) 몇십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천체 현상으로 인해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게 좀 신기하더라. 어쩌면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어. (…) 뭐,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나는 이제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려고. (…) 아쉬움 없이, 원 없이 살아보고 싶어. (…) 그래서 지금 이 답장도 쓰는 거야. 네가 보내온 마음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어서. 팔 년쯤 됐을까. 오래도 걸렸다.


- 창작과 비평 182호, 휘는 빛 中



환하게 밝은 별을 볼 수 있는 개기일식은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의 방향을 묻는 시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그 순간이 정말로 오기 힘든 시간이면서도, 간절히 기다리고 반응하면 한 번쯤은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이 소설은 인물이 '관심'을 통해 외로움을 낳을 수도 치유할 수도 있다는 간극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관심'이 폭력적인 외로움으로 끝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어지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소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종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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