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실하게 살면 행복할 수 있나요? [기타]

글 입력 2019.03.2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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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을 걱정하는 4학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생, 그리고 여성인 나는 사회에서 꽤 불리한 타이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학비가 비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일터에선 성희롱을 당하고, 수차례 손님들의 폭언을 들어야했으며, 그 와중에 스펙 쌓기에 몰두해도 취업이 어려우니 말이다.


성실하게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바쁜 이들의 삶에서 행복과 여유를 찾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런 우리네 삶을 다소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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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은 중학생 때 공장에서 일하는 삶과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학업을 선택한다. 고등학생 때 자격증을 13개나 딸 만큼 손재주가 좋았지만, 14개째 따던 날 선생이라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남들한테 없는 네 진짜 무기가 뭔 줄 알아? 노력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게 바로 네 몸매야. 그걸 알고 있는 여잔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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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 모든 자격증이 사실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결국 공장에 취직해 사회의 쓴맛을 아는 동시에 남자를 겪는다. 수남은 사랑하는 남자와 같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십 년 동안 배달과 식당일을 겸하며 종일 노동을 한다.


그렇게 일생 전반을 성실하게 보내지만, 대출을 끼지 않고서는 단칸방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은 수남을 더욱 옥죈다. 집을 구했음에도 대출금을 갚기 위해,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며 누구보다 더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나간다. 그런데도 사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발뺌하며 그를 더욱 고립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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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남은 살인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며 살인에 무뎌져 가는 수남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영화는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현실은 영화보다 더 기이하고 잔인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정직하게 돈을 버는 노동자는 늘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악화한 건강에 들이는 돈은 점차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대우도 못 받는 열악한 일터에서 일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많은 사람이 돈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가 내놓은 단 한 가지 선택지만을 선택했을 뿐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폭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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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몇몇 장면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기괴하지만, 수남에게 일어난 일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쉼 없이 우울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분명 내 잘못도 아니고 옆에 있는 부모나 친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일상 속에서 쌓인 짜증 섞인 분노를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터뜨리거나, 나보다 더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분풀이하기도 한다. 자신보다 밑에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이른바 ‘갑질’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거대하고 견고한 사회보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나약한 개인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폭력은 그렇게 순환하고 일상적인 것이 된다. 현대 시대의 일상적인 폭력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고문과 살상 등의 전체주의적인 폭력 사건과는 다른 듯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병들어가는 사회는 은밀하게 폭력의 형태로 일상에 침투해 서로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는 현대인의 흔한 질병이 되어 서로 처지를 비관하며 위안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동안 사회는 개개인을 정신질환으로 진단하는 간편한 방식으로 사회 구조적인 병폐를 방관한 것은 아니었을까?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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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 <견상(犬狀)자세 중인 알바생>
맥도날드 쓰레기, 153×200×308cm, 2014
 


그리고 여기, 일상적 폭력의 실태를 고발하고 끊임없이 저항하는 작가가 있다. 신민은 맥도날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맥도날드 폐휴지와 포대를 이용해 표현한다. 작가가 분노하는 지점은 여전히 유효한데, 견상자세를 취하는 작품 속 인물들은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비정규직이자 여성인 우리네 고된 노동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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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 <no 유토>, 초코렛 금박지, 볼펜

각 10×6×3cm 내외, 2017



하지만 민주주의의 지지부진함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신민은 작업으로나마 개인적으로 화를 내고, 안전하게 데모를 벌이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이렇게 No라고 외치는 자신의 분신을 만들면서 말이다. 저항은 이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가까운 사람에게 생각과 감정을 떠드는 것만으로 발화점이 될 수 있다.


다만 불쾌하다는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비난하는 세태가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약자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문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만의 견고한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 거대한 벽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분노하고 저항해야 한다.



[박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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