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폭력에 대항하는 자세에 대하여 [도서]

정용준 - <선릉산책>을 읽고
글 입력 2019.03.2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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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항하는 자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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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산책은 ‘산책’이라는 평화로운 제목과는 상반되게도 다층적인 폭력의 양상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화자인 ‘나’는 일일 아르바이트로 지적장애가 있는 한두운의 보호자 겸 놀이상대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한두운의 이모라 불리는 보호자는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나에게 한두운을 일곱 시간 가량 봐줄 것을 부탁한다.


그를 돌보는 데에는 일종의 매뉴얼이 존재한다. 그는 머리를 때리는 자해를 하며, 침을 뱉고 헤드기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시비가 붙기 좋으며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로 쏠리기 쉽다. 그리고 그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계속 말을 해야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으므로 ‘나’는 혼잣말을 하게 된다. 즉, 그를 돌보기 위해서는 그와 근접해지는 동시에 그에게서 멀어져서 타인의 시선으로 ‘그와 나’를 바라보며 ‘우리’가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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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폭력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상이 가하는 폭력에서 한두운을 지키는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으로부터 그를 지켜내야 하며 한두운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나는 마지막을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소설을 읽어나갔다.

 


한두운과 ‘나’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나는 치와와 한 마리를 발로 차는데, 이 장면을 본 한두운은 대뜸 내 손을 잡는다 (22p)



‘나’는 한두운이 그러하듯 세상의 불특정한 대상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잠시 하나 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장면을 단순하게 넘어갈 수만은 없는 것이,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장면은 다른 이들이 한두운에게 가하는 폭력의 양상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다.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선릉에 있던 아저씨가 한두운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질문한다.



뭐 하는 사람이야?

그러지 마세요.

내가 뭐? 응?

불쑥 짜증이 치솟았다. 다른 아저씨는 어느새 한두운의 앞에 서 있었다.

(중략)그는 내게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23p)



아저씨가 한두운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 이전의 내가 개에게 가했던 폭력의 태도는 일정 부분 겹쳐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한두운은 완벽한 권투 펀치를 날리며 나를 향해 웃어 보인다. 여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아, 그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그것도 다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단다.

주로 보호자의 고충에 포커스를 맞춘 내용이었다.

대충해. 날도 더운데.

자해를 하는 것이라면, 화가 난 것이라면, 저렇게 힘 없이 아아, 하지 않을 거라고. (25p)


 

‘나’는 한두운이 지금까지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보호자에 포커스를 맞춘 설명들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가 자해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은 모조리 학습된 것이며, 결국 한두운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은 그가 처한 환경에서 다른 이들에게 받았던 것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나는 한두운과 나란히 걸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며 포즈를 취해 보였다. 가방 탓에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30p)

 


나는 한두운과 함께 권투를 한다. 한두운에게 있어서 권투는 세상을 대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권투라는 것은 링 위에 섰을 때 시작이 되며 폭력이 스포츠로서 합리화된다. 그런데 한두운은 늘상 헤드기어를 쓰고 있으며 그에게는 무거운 추 같은 가방이 짊어져 있다. 그의 행동들은 그가 살아가는 세계, 폭력에 대항하는 자세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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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주먹과 자신 사이에 필연적인 거리가 존재한다는 듯 예민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그 눈이 나를 향한 것인지 한두운에게 향한 것인지 둘 모두를 향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머쓱한 기분에 주먹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32p)



나는 앞서 말했던, ‘한두운이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은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은 타의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걷기만 해도 무언가가 우리에게 달려드는 세계 속에서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내가 그의 가방을 벗겨 내려놓고 헤드기어를 벗겨 그를 씻겨주었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한두운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나는 다른 종류의 분노를 품게 된다.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보호자의 태도와 무엇이 문제냐고 묻는 우진이 형에게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나는 그 분노를 가장 약한 자인 한두운에게 풀어놓는다.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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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운은 나를 떠나 중학생들과 시비가 붙는다. 그리고 중학생들에게 얻어맞은 후에 그는 자기 자신을 때리기 시작한다. 그냥 툭툭 치는 게 아닌 링 위의 복서처럼, 자기 자신을 세게 때린다. 마치 이전까지의 싸움은 정식 싸움이 아니었다는 듯이. 이것이 진정한 싸움이고, 정당한 폭력이라는 듯이.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주먹은 정당하게 느껴진다. 뒤늦게 보호자가 나타나고 보호자는 절망하며 나를 질책한다.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는 한두운은 ‘나’를 향해 한 마디를 건넨다.


“파피용.”


우리는 어쩌면 속았을 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두운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가 자신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은 그가 사는 세계에서 가장 정당한 폭력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나에게 파피용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넨다. 내가 아마추어처럼 링 위에서 한 대를 때리면 한 대를 맞고, 그렇게 패배한 후 링 아래로 내려왔을 때 느낀 감정이 있듯이. 그러나 한두운에게는 올라갈 수 있는 링도, 내려올 수 있는 게임도 없다. 그는 그저 산책을 하듯 끊임없이 어딘가를 맴돌며 잭을 날리고 있다.



[이정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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