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꿈과 저주, 사랑과 광기 사이 - 아랑가 [공연예술]

길고 긴 삶에서 어찌 울지 않을 수 있는가?
글 입력 2019.03.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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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 _ 왜 그녀에게 아랑이라는 이름을 주었는가?



사랑은 무엇이냐? 도미 부부 설화를 모티브로 탄생한 창작 뮤지컬 <아랑가>에서는 끊임없이 삶과 인생과 사랑에 대해 묻는다. 그것은 마치 예언이나 저주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고, 또 뒤늦게 눈을 뜬다 하여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질문 아래에서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끝내 무너지는 인물이 개로이므로, 뮤지컬 <아랑가>의 주인공은 아랑이라기 보다는 개로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에 앞서, 뮤지컬 <아랑가>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자. 도미 부부 설화를 알고 있다면, 그리고 백제의 개로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아랑가>의 내용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도미 부부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 사람 도미는 호적에 편입(編戶)된 평민으로서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그의 아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절개가 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 개루왕은 그의 아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두고 신하를 시켜 왕의 옷을 입고 마부를 데리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한 다음, 도미의 부인에게는 따로 왕이 행차할 것이라고 알리게 했다. 왕을 가장한 신하는 그 부인에게 「나는 오랫동안 네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미와 내기하여 이겼으니 내일 너를 궁인(宮人)으로 들이기로 하였다. 이 다음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라며 동침하려 했는데, 부인은 「국왕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계집종을 꾸며 대신 방에 들여 보냈다.


그러나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도미에게 가짜 죄를 씌워, 그의 눈을 멀게 하고 홀로 작은 배에다 실어 강에 띄워 보낸 뒤, 다시 도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간음하려 했다. 부인은 「지금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보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왕의 시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향기롭게 목욕한 후에 오겠습니다.」라고 둘러댔고, 이번에도 왕은 그 말을 믿고 허락하고 말았다.


부인은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향해 통곡하다가 문득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이르는 것이었다. 그것을 타고서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부인은 남편 도미와 재회하였다. 다행히 도미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후략)



도미 부부 설화와 <아랑가>는 큰 줄기는 같을지언정, 그 부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중 평민이었던 도미가 왕의 장군이 되었고, 왕의 곁에는 왕의 눈을 가리는 고구려의 첩자 도림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두드러지는 차이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에 속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도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은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짧은 고전이 두시간 가량에 이르는 뮤지컬로 재창작되면서 인물들이 더욱 생생히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도미는 공적으로는 진정 신의를 갖춘 충직한 장군이며 사적으로는 아내를 아끼고 신분이 낮은 이에게도 인정을 베푸는 선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개로는 아랫사람의 아내를 권력을 이용해 간음하려는 파렴치한 왕에서 어린 시절의 저주와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중압감으로 괴로워하는,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하며 갈등하는 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고구려를 위해 개로를 속이는 도림과 자신을 거둬준 도미, 아랑 부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사한까지, 그들은 모두 설화에는 없거나 희미하게 그려지던 성품과 욕망과 내적인 갈등을 얻었다.


그러나 아랑은 아니다. 도미 부부 설화에서 도미의 아내는 왕을 두 번이나 속일 정도로 배짱있고 기지가 넘치는 현명한 여인이었으나, <아랑가>의 아랑에게서 그만큼의 배짱과 재치 있는 지혜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아랑은 매우 선하고, 인정이 넘치는 여인이지만 남편과의 신의, 사랑 그리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목적 이외엔 다른 욕망도 갈등도 가지지 못한다. 남편의 누명 앞에 진실을 밝히려던 절규는 수포로 돌아가고, 남편은 사랑을 위해 살기보다 충신으로 죽기를 원한다.


그 상황에서 아랑이 할 수 있는 것은 재치를 발휘에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울며 자신을 바치겠노라 읍소하는 것 뿐이다. 그 시대의 여인이 달리 어떤 욕망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어떤 계략을 꾸밀 수 있었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설화에서조차 등장하였던 그녀의 현명함 마저 빼앗아갈 심산이었다면 어찌 그녀에게 아랑이라는 이름을 주고 아랑가라는 제목을 지었는지 그것이 아쉽다.




개로 _ 우리는 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뮤지컬 아랑가_ 하이라이트 영상


     

<아랑가>는 어쩌면 설화보다도 더 설화 같다. 저주와 꿈 그리고 하늘의 도움은 모두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개로는 자신이 왕이 되면 눈이 멀어 구천을 떠돌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왕이되 왕이 아닌 사내가 될 것이라는 저주에 사로잡혀 있다. 왕이 된 이후에도 그는 백제의 태양이 저물 것이라는 그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구원은 아랑이 등장하는 꿈이고, 그 꿈이 하늘과 부처의 뜻이라는 고구려의 첩차, 도림의 말이다. 개로는 그의 말에 속아 아랑의 남편이자 충신인 도미의 눈을 멀게하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다. 저주와 사랑으로 인해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한 개로의 어리석음 탓에 저주가 실현된 셈이다.


개로에게 담담히 대답하는 아랑의 말처럼, 꿈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저주는 달리 말하자면 비이성적인 공포이다. 짚으로 기워진 저주 인형에 못을 꽂는 등의 행동이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현대에서는 많지 않다. 허나 이 이야기는 인간이 이성보다는 하늘의 뜻에 눈을 돌리던 지금으로부터 몇백년 전의 이야기이고, 현재라고 하여서 우리가 모두 그런 비이성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좋지 않은 예언과 저주를 허무맹랑한 것이라 치부하여 무시한다 하여도, 그 전조처럼 보이는 일이 우연이라도 일어난다면, 설마? 하는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는 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저주의 말처럼 백제의 해는 저물고 있었다. 여러 장면들이 그의 갈등과 억눌린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소요되며, 그 말과 노랫말로 우리는 그의 슬픔과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다. 그가 겪는 중압감과 그 불안감는 그 긴 세월을 살아왔어도 산 것 같지가 않다는 그의 대사로 다시 다가온다. 떠밀리고 짓눌려 살아온 세월을 제외한다면, 그가 살아온 세월은 얼마나 될 것이며 우리가 살아갈 시간을 얼마나 될 것일까?




도창 _ 아랑가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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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아랑가>가 아름답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는 이유 중 하나는, 흰 실들이 발처럼 드리워져 때로는 스크린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물들을 감추거나 그 실루엣만을 드러내주는 무대와 공연 중간 중간 판소리로 극을 이끄는 도창의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도창은 때로는 저주의 예언을 하는 무녀이기도 하고, 극중의 상황을 설명하는 해설자이기도하며, 무대위의 장치들을 옮기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보게끔 해주고, 실제 존재하지는 않지만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다. 처음 왕후의 승하를 알리며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강렬한 에너지와, 도미가 국경지대에서 마주한 처참한 백제 백성들의 상황을 묘하사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슬픔의 표현은 강렬하지만, 나래이션으로 진행되는 상황이 가지는 한계는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창이 소리하는 판소리와 다른 캐릭터들이 부르는 양음악의 조화는 아름답고, 아랑가만의 특색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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