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낯설디 낯선, 연극 <굴레방 다리의 소극>

글 입력 2019.03.26 00:0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REVIEW ***
연극 <굴레방 다리의 소극>


굴레방다리의소극_포스터.jpg
 

연극 <굴레방 다리의 소극>을 보러가기 전, 약간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전작인 '보이첵'을 몇 달 전 접했을 때 너무 난해했고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에게 너무 어려우면 어쩌지 라는 걱정과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를 안고 두산아트센터로 향했다.

연극이 끝난 뒤,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너무 집중해서 본 탓일까 뒷목도 뻐근한 것 같았다. 120분 동안 휘몰아치는 엄청난 양의 대사와 그 모든걸 소화해냈던 배우들의 연기로 연극에 엄청 몰입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낯선 부분도 역시나 많았다. 연극을 보면서, 보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연극을 보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오르는 의문과 감정들을 차차 정리해보고자 한다.


굴레방다리의소극_공연사진1.JPG
 


1. 연극과 현실


무대의 조명이 켜지자 곧바로 연극 속 연극, 그러니까 극중극이 시작되었다. 사전 정보로 <굴레방 다리의 소극>이 극중극 구조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시작과 동시에 극중극이 진행되니 약간 의아했다. 아버지 대식과 두 아들 한철과 두철이 사는 어느 허름한 서민아파트 지하방에서는 매일같이 똑같은 연극이 반복되고 있었다.

연극은 대식의 가족들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듯 했다. 대식의 두 아들인 한철과 두철은 어머니(대식의 아내), 대식의 동생 태환, 태환의 아내 순자, 순자의 자식과 사위들까지 연기한다. 장면이 변할 때마다 급변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매우 인상깊기도 했다. 고향(연변)을 떠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족들을 재연하는가 싶었으나 연극의 내용은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죽은 사람의 머리를 갈라 뇌수술에 성공한 의사와 같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연극의 배우 겸 감독인 대식은 종종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을 때 연극을 중단시킨다. 그 때는 바로 연극이 사실적이지 않을 때인데, 냄비에 닭이 있어야 하는데 소세지가 있을 때가 바로 이러한 때다. 이 떄마다 대식은 "사실적이지 않다!"고 외치며 매우 분개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연극의 사실성은 마치 모순과 같기도 하다. 아무리 연극이 현실을 흡사하게 구현한다고 해도 연극은 조작된 어느 상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식은 연극의 사실성을 강조하며 심지어 연극을 현실처럼 믿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대식은 연극과 현실에서 유일하게 같은 인물이다. 여러 역할을 맡는 아들들과 달리 대식은 연극 속에서도 '대식'의 역할만을 소화한다. 어쩌면 연극은 대식이 믿고싶어 하는 것들로 구성된 장면인 것 같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식은 어느 지하방에서 자신이 꿈꾸는 것들을 담은 연극을 창조해냈고, 그것을 마치 실제처럼 믿으며 수도없이 반복해 상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굴레방다리의소극_공연사진4.JPG
 


2. 연변과 서울, 그리고 몽골


대식과 두 아들의 대사는 모두 연변 사투리로 진행된다. 연변을 떠나 서울에 온지 꽤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모습만 본다면 연변에 계속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극의 중간 대식의 대사를 본다면 대식에게 지금 살고 있는 지하방은 정착의 장소라기보단 어느 도피처로 생각된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연변과 달리 서울은 너무나도 삭막한 공간이었고, 불안감과 공포에 쫓기듯 달리던 대식이 발견한 곳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지하방이기 때문이다.

마치 방공호에 거주하는 듯이 스스로를 감금한 대식의 공포는 자식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온 한철과 두철은 지하방에서 대식을 만나고, 그 때 이후로 두 아들 역시 지하방에서만 살게 되었다. 이들에게 서울은 두려움과 공포의 도시이고 절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되는 위험한 공간이다.

연변과 서울 외에도 연극에는 다른 공간이 등장하는데 바로 몽골이다. 몽골이라는 장소가 극중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극의 중반부 쯤 등장하는 인물 김리로 인해 몽골이 등장한다. 김리는 한국으로와 마트직원으로 일하는 몽골인으로 흔히 말하는 외노자(외국인노동자)이다. 매번 마트에 장을 보러간 두철의 물건을 계산해주며 안면을 트게 되고, 뒤바뀐 두철의 짐을 가져다 주기 위해 지하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사실 연극에서 김리라는 인물을 몽골인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하방에서 진행되던 연극이 어느 한 외국인의 등장으로 인해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 이방인이 '그동안 이렇게 살았던거야?'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연극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3. 고립과 소통


연극의 공간적 배경은 서울이지만 극 중에서 흔히 말하는 서울말, 표준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연변 사투리만을 구사하는 부자들과 몽골 억양이 남아있는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는 김리. 이들은 모두 서울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서울을 대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다. 대식과 두 아들은 지하방의 문을 닫고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여러 개의 자물쇠를 걸어잠근 방 안에서 끝 없이 한 연극을 반복한다. 그 연극은 대식의 소망과 아들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전부 다 허구이며 그들을 오히려 계속 고립시킬 뿐이다.

반면 김리는 서울로 와 어떻게든 서울에 적응하려는 인물인 것 같았다. 낯선 나라에서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며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리는 처음으로 지하방의 문을 여는 이방인이기도 하다. 김리의 등장으로 연극의 오류들이 발견되고 결국 한철과 두철이 부조리한 연극을 깨닫게 된다.

연극의 클라이막스에서 학철은 아버지 대식을 칼로 찌른다. 대식의 죽음으로 대식이 시작했고, 대식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던 연극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한철은 또 다른 짧은 연극을 꾸몄다. 김리를 찌르는 시늉을 하던 한철은 두철에 의해 죽게 된다. 좀 전의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지하방의 문은 다시 열리고 김리는 탈출에 성공했다. 열려있는 문을 바라보던 두철은 머뭇거리다가 문 밖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지하방으로 들어와 문을 다시 잠그고 혼자만의 연극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

아직도 <굴레방 다리의 소극>을 떠올리면 많은 의문들이 떠오른다. 극중극이라는 낯설었던 구조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주제를 소재로 한 굴레방 다리의 소극. 나에게 매우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 연극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시간 동안 엄청난 연기를 펼치며 열연한 배우들에게도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앞으로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작품은 나에겐 믿고 보는 작품이 될 것이다.


[정선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