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원하는 것을 하라, 가볍게, 힘껏. [도서]

글 입력 2019.03.3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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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아트인사이트는 (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자아실현’이라고 답했다.

 

가볍게 답할 요량은 아니었지만, 정말 거의 1초 만에 나온 말이어서 나중에 생각해야 했다. 너, 그 대답, 그러니까 ‘자아실현’이라는 표현, 너무 쉽게 사용한 거 아니냐고. 왜 이상한 부채감을 느꼈나. 아마 ‘자아실현’은 ‘내 마음이 가는 대로’라는 의미도 담겨 있어서, 어떤 것을 사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고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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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A>, 243호 기획 기사 중 하나인 ‘즐거운 고군분투, 독립출판’에서 자아실현이라는 표현을 보고 위 일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기사의 맥락을 파악하며 내가 느꼈던 부채감이 조금 덜어졌다. 새롭게 알았다. 자아실현은 아예 원초적인 바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가벼움’의 성질이 필연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사실을.


 

디자이너가 자아실현 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독립출판’이다. … 우리는 독립출판으로 어디서나 냉대받을 실험 같은 것을 해 볼 수도 있다. … 아등바등하는 지루함을 차 버릴 수 있다. … 터무니없는(?) 완성도를 지닌 것들, ‘예쁘다’를 넘어서는 것들. (33쪽)

   


자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재밌는 것. 때론 어처구니없어도, 어떤 기준에서 실용적이지 않아도 ‘자아’의 기준에는 합당한 것이라면 오케이. 대개 디자인은 상업적 목적달성을 위한 작업으로 분류되지 않는가. 그러나 ‘자아 실현하는 디자인’은 이 범위도 아주 쉽게 벗어난다. 단지 도구가 디자인이 될 뿐.


예를 들어 팡팡팡 그래픽 실험실은 ‘불꽃을 키워드로 부유하는 언어를 그물로 건져 올리는 콘셉트’로, 까만개 프레스는 ‘탁자 위에 달걀이 놓이는 방식’을 고민하여 책을 만들었다. 모두 창작자 개인의 기준에서‘만’ 흥미가 있을 수도 있는 주제이거나 내용.


그러나 하는 것이다, 자아가 원한다는 이유로, 여러 조건 따지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실현하자는 일단의 목적으로. 결과적으로 이 ‘가벼운 바람’은 주류가 판을 치는 출판 현장의 색깔을 좀 더 다채롭게 가꾼다. 제각기 다른 가치를 창출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작업의 완결성은 좋아도 더 가볍고 사소한 걸 만들고 싶은데, 자꾸 힘이 들어가서 고민입니다. -디자이너 김희애 (40쪽)

 


거창한 걸 하고자 하는 목적이 애초에 아닌 것이다, 자아실현은. 그러나 하나는 확실히 해야겠다. ‘더 가볍고 사소하’더라도 ‘완결성’을 추구한다. 얼핏 비례관계여야 할 것 같은 작업의 명분과 완성도의 관계는, 기이하게도 아닐 수 있다.

 


팡팡팡 그래픽 실험실은 자아실현을 위한 디자인 프로젝트 그룹이다. (34쪽)

 


갑자기 자기반성을 해 본다. 나는 디자인 전공자로서, 디자인은 대중의 눈에 합당해야 한다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디자인과 멀리 떨어져 나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나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 결정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자기만의 디자인을 하는 다른 디자이너, 창작자들이었다.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만나다 보니 지금까지 내가 디자인이란 분야를 일부는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노선을 바꿀 수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 사실 이 문장이 아주 자신감 있게 써지진 않는다. 누구나? 브레이크를 거는 원인은 간단하다. 생계. 이 문장을 다시 써 본다. 생계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아니 이렇게 쓰고 보니 또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생계가 가장 우선이야? 고민하다가 이렇게 다시 써 본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하라, 각자의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볍게, 힘껏. 지금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사실 목차를 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기사는 INDUSTRY ISSUE, ‘진짜, 정말,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었다. 진짜, 정말, 모두라고 세 번을 강조한 디자인의 정체는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아우르는 유니버설 디자인에 관한 내용이었다.

 


비장애인을 위한 브로슈어에 점자가 함께 인쇄되어 있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유니버설 디자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비장애인이 브로슈어를 펼쳤을 때 ‘세심한 것까지 배려했네’라고 느끼는 지점, 시각장애인이 굳이 ‘시각장애인용 브로슈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 이런 사소한 지점에서도 진정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체감’할 수 있다. (118)

 


점자가 함께 인쇄된 브로슈어는 시각 장애인‘만’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누리도록 디자인된 브로슈어의 물성 자체가 유니버설 디자인의 상징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장애인에게는 커다란 놀이기구가 랜드마크인 반면, 시각장애인에게는 오히려 작은 매점이나 분수대 등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고 다른 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랜드마크가 된다는 설명도 새로웠다. 흔히 하는 가정이지만, 만약 시각 장애인의 수가 비장애인의 수보다 더 많았다면 오히려 세상의 지형지물은 지금의 시각장애인 기준으로 설립되었을지도, 그래서 세상은 지금보다 ‘더 작은’, '더 감각적인'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다수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틈을 내어, 시각장애인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술적인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결국 우리들의 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애 이야기가 아니라 감각 이야기다. …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생존이라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 본다는 것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고, 자신만의 정의내리기 과정을 거치는 일. (124)

 


기술적 작업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을 디자인 주체로 돌려 ‘본다는 감각’을 전환하는 예술적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는 실제 사용자들과 공유하며 서로가 원하는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진짜, 정말,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된다.

 

*

 

이 외에도 기억에 남는 기사가 많다. CA 컨퍼런스에서 디자이너의 스트레스와 한약 처방을 연결한 주제도 흥미로웠고 모니카 바이세나비치에네의 그림책 제작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된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매우 유익했다.

 

매거진 <CA>는 디자인 전문지라 디자인 실무와 관련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지만, 조심스레 관련 외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도 추천해 본다. 읽다 보면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는 디자이너가 문제를 지각한 문화적 이슈로부터 출발하거나, 귀결된다는 사실을. 새로운 생각은 때론 낯선 곳에서 얻게 되듯이, 젊고 가벼운 듯 진지한 이 매거진이 잠시의 휴식이 되어줄 것이다.






디자인 매거진 CA #243
(2019년 3~4월호)
簡潔堂堂 디자인의 흐름

CA 편집부 지음 ㅣ 160쪽 ㅣ 220 * 300mm ㅣ 무선제본
16,000원 ㅣ 2019. 2. 27 ㅣ CABOOKS 발행 ㅣ 양민영 디자인
ISBN 977-23-8418-200-9ㅣ ISSN 2384-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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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커버 스토리가 한자라서 당황하셨죠? 簡潔堂堂의 음독은 ‘간결당당’, 말 그대로 간결하고 당당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디자인 트렌드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두 키워드이기도 하죠.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진 흐름인 ‘간결함’, 그리고 이제는 디자인계에서도 하나의 큰 물결이 된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 내기’ 트렌드를 CA 243호에서 만나 보세요. 또 다른 기획 기사는 독립출판입니다. 우리는 독립출판을 ‘즐거운 고군분투’라고 표현해 보았는데요. 기사를 읽다 보면 독립출판이 왜 즐거운 고군분투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더불어, 독립출판에 새로이 뛰어들 분들을 위한 팁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INDUSTRY ISSUE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을 다뤄 봤습니다. 우리가 유니버설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정말 유니버설한지, 한번쯤 되물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어지는 이슈는 스톡홀름의 디자인 스튜디오 SNASK와, 이를 소개한 다큐멘터리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얼렁뚱땅 스튜디오를 소개하고 끝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INDUSTRY ISSUE에 싣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화두로 삼아야 할 문제도 지적하는 멋진 다큐멘터리 제작기입니다.

INTERVIEW 섹션도 풍성합니다. 『월간한옥』을 디자인하는 이건하 디자이너를 만나 『월간한옥』 디자인 이야기, 그리고 ‘미친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셀린박과의 인터뷰에서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인 ‘비판적 디자인’을 콤팩트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PROJECT 섹션에서는 맥주 브랜드 칼스버그의 171년 유산을 리브랜딩한 택시 스튜디오, 새로운 산 세리프 타입페이스인 픽스처를 만든 서드티포스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런던의 업무 공간 벤처 트웬티투를 브랜딩한 더 뷰티풀 밈, 스카프를 디자인 플랫폼으로 삼는 장채아, 생리에 대한 금기를 깨는 NH1 디자인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디자인이 소생하는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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