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낭만적 가능성, 그 아래 감춰진 추악한 진실 - 스위밍 레슨

글 입력 2019.04.0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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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레슨>의 표지를 보면, 작은 물결이 요동치는 검푸른 바다 한 가운데, 무겁게 축 가라앉은 젖은 긴 머리를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성의 눈은 마치 깊고 깊은 바다 속으로 곧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공허하고 우울해 보인다. <스위밍 레슨>은 바로 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다에 천천히 잠식되어가는, 그럼에도 그 한가운데에서만  숨을 쉴 수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잉그리드의 편지, 가장 어둡고 비밀스러운 진실



<스위밍 레슨>은 ‘길 콜먼’이 서점에서 12년 전 갑자기 사라진 아내 ‘잉그리드’의 마지막 편지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길 콜먼의 수많은 책 속에 숨겨진 수십통의 편지에는 잉그리드가 1976년 길 콜먼을 처음 만난 날부터 1992년 7월 2일 그녀가 종적을 감춘 날까지 그녀의 모든 진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은 늙고 병든 길 콜먼과 그녀의 두 딸 ‘플로라’와 ‘낸’이 존재하는 현재 시점과 잉그리드의 편지로 드러나는 과거 시점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잉그리드의 편지에는 어떻게 그녀가 길 콜먼과의 삶에서 서서히 망가져갔는지 서정적으로 풀어나간다.


잉그리드는 그녀의 친구 루이즈와 함께 여성인권을 주장하며 보통의 엄마들과의 다른 삶, 자유롭게 공부하고 여행을 하는 인생을 꿈꾸는 20살의 대학생이었다. 그런 그녀의 인생관은 작가인 ‘길 콜먼’을 만나게 되면서 흔들리게 된다. ‘길 콜먼’은 39세였지만 너무도 매력적이고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잉그리드는 그와 쉽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여름방학이 되자 그녀는 반짝이는 바다와 드넓은 대지가 펼쳐있는 ‘스위밍 파빌리온’에 위치해 있는 길의 집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눴지만 그만 임신을 해버리고 만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그녀였지만 자신의 입을 한 번에 막아버리고 결혼을 하자는 길 콜먼의 달콤한 속삭임에 그 생각은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넌 훌륭한 엄마가 될 거야.”
 

그리고 길 콜먼이 몇 번이나 잉그리드에게 한 이 말은 여성으로서 그녀의 존재를 점차 지워버리고 만다, 길 콜먼은 자유로운 영혼 마냥 그 어떤 사람에게도 구속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애를 6명이나 낳고 키워주는 여자를 원하는 사람이었으니깐.
    


3시 12분에는 나 자신과 잠, 딸들 그리고 당신에게 화가 나요. 매트리스를 발로 차고 눈이 터지기 직전까지 손가락으로 감은 눈을 찔러요. 일어나 침대에 앉아서 당신의 작업실을 바라봐요. 물론 거기에 불이 커져 있을 때는 한 번도 없어요. 추운 날은 거실과 주방을 왔다 갔다 하는데, 요즘은 몸을 꽁꽁 싸매고 베란다 테이블에 앉아 당신에게 편지를 쓰죠. (208p)



남편의 배신과 부재, 두 딸 사이에서 겪는 소외감으로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잠도 잃어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없애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가 일렁이고, 하루가 또다시 시작됨에 구역질이 나는 새벽에 그녀는 그렇게 길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진실들을 꾹꾹 담아서. 그러면서도 길이 돌아 와주기를 바라면서.




스위밍 레슨



잉그리드가 길 콜먼에게 압도되어 내내 수동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삶에 에너지를 느끼는 기쁨을 그녀는 경험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작품의 제목이 ‘스위밍 레슨’인지를 말해준다.


그녀는 수영을 좋아했다. 물속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수영을 하면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거친 물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밀려나버리고 만다. 몇 번이나 물에 빠지는 위기에 처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물 밖으로 나와 무사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해변 사건 이후에 느낀 취기가 기억나요. 생존에 취했죠.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어요. 물과 싸워서 이긴 거예요. 모든 게 기적이었어요. (280p)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지겨운 일상에 기쁨을 느끼고, 길에게 매일 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긴 길 콜먼은 그 작품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수영을 통해 물과 이긴 경험은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엄마’가 아닌 ‘잉그리드’라는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그녀가 의존하는 길 콜먼이 없어도 그녀는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고 말이다.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혼자 버려진 어린 새 같아요. 하지만 해변에서 나 혼자 이겨 냈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날 구해줄 당신도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았죠. 나 혼자 해낸 거예요. (250p)



그녀가 그 날의 경험이 알려준 것을 깨달은 날은 또 한번 자신의 힘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해변에서 자신의 지갑과 코트를 훔쳐간 남성들로부터 강간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했지만 불가에 놓인 막대기를 활용하여 남성들을 무찔렀다. 무사히 코트를 되찾은 그녀는 파도 속에 쭈그리고 앉아 해변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품은 끝내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가 사라졌다고 느꼈지만 ‘살아가는’ 이유가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처참하게 무너져갔지만 그녀는 이미 물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수영은 그녀에게 숨 막히는 삶에서 벗어난 ‘삶의 외부’와 만나게 해주고 생존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바다에 영원히 잠식되어버린 것이 아닌 바다에서 숨을 쉬는 한 마리의 자유로운 물고기가 되었다고 본다.


*


<스위밍 레슨>은 어쩌면 아침드라마와 같은 흔하고 불쾌감을 들게 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흔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나간 작품이다. 더하여 현재시점을 이끌어가는 ‘플로라’는 부모로부터 아이가 받은 상처와 결핍을 표상하면서도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은 진실과 거짓을 뒤섞여버려 작품의 깊이를 더해줘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플로라는 과거의 기억을 왜곡하면서까지 자신의 아빠의 화려하게 꾸며진 거짓인생을 굳게 믿으면서도, 계속해서 ‘물고기’의 환영을 본다. 하늘에서 고등어 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하며 도로 한 가운데에서 누워있는 새끼 고등어 한 마리를 보기도 한다. 그리고 잉그리드의 편지에는 그녀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힌 고등어를 묘사하는 장면과, 유일하게 애착을 느꼈지만 유산된 아이 ‘조지’를 작은 물고기에 비유한 장면이 등장한다. 결국 플로라가 본 환영은 거짓이지만 가려진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은 아름다운 묘사와 수많은 메타포로 잉그리드의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검푸른 바다와 그 한가운데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강렬한 정서적 파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한참을 그 여운에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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