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9. 불타오르는 애국심

글 입력 2019.04.0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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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의 중간, 말라가, 화나게 좋은 날씨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장점 외에 단점까지도 전부 파악해버린 사이. 그게 내가 생각하는 한국과 나의 관계이다. 그래서 난 내 모국이지만 한국을 엄청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애국심이 불타오르는 순간들이 있는데 바로 한국 음식에 대해 논할 때와 차별을 겪을 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럽과 여행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여행에서 더 나아가 외국에서 사는 것을 생각할 때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방에 있는 예쁜 건물들과 새로운 언어, 낯설지만 친절한 사람들. 나 또한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했다. 3달 정도 살아보며 깨달은 것은 너무 이상적인 태도는 현실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말라가에 도착한 날부터 인종차별 쓰리 콤보를 겪었다. 이것이 행운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건 덕분에 인종차별에 있어 외국인들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엔 길을 다니다가 누가 이소룡 흉내를 내고 가더라도, 할아버지가 가던 길을 굳이 굳이 돌아와 "예쁜 중국인"이라고 추파를 던지고 가더라도 나름 괜찮았다. 좀 더 정도가 심한 경우여도 "저 사람들은 잘 몰라서, 동양인을 처음 본 시골 사람들이라서 그래.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진 내가 이해하자."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실제로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은 우리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세계사를 배울 때, 프랑스혁명이나 세계대전에 대해 배우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한 환경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문제는 문화에 대한 무지함이 인종 차별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있으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최근, 말라가에 있는 교환학생들을 비롯해 거주하고 계신 한인 분들까지 분개할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일명 "말라가 대학교 FAN-CINE 포스터 사건"



fancine poster.jpg▲ 말라가 대학교 FAN-CINE 행사에 이용된 포스터
 

우선, 배경을 설명하자면 말라가대학교에는 스페인에 몇 안 되는 동아시아학과가 있는 대학교이다. 그만큼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많고 현재 우리나라의 인천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말라가대학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의 포스터가 문제가 되었다. FAN-CINE라는 아시아 영화 페스티벌 포스터에 욱일기가 사용된 것이다.


학교 전체를 비롯하여 학생들이 자주 가는 바와 음식점까지. 말라가 전체에 욱일기가 사용된 포스터가 도배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동아시아학과가 있는 말라가대학교에서 이런 포스터를 사용하다니! 길 지나가다 보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교환학생을 온 학교가 이러고 있는 것을 보자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이후, 한인 분들과 스페인어를 잘하는 교환학생분들을 주축으로 한국 대사관과 대학교에 포스터에 대해 항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학교 측에서는 뜨뜻미지근한 해명과 함께 행사 당일에는 수정된 포스터를 이용하겠다는 대안 정도만 제시했다. 자신들의 이해가 부족했음에 대한 명확한 인정과 사과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포스터 디자인이 수정되면서 FAN-CINE 사건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잘못 만들어진 광고의 파급력을 확인할 수 있는 개인적인 모먼트가 있었는데 바로 광고학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말라가대학교에서 영문학 수업 하나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 수업 두 개를 수강하고 있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수업 중 하나는 <이미지에 대한 이론과 분석>이라는 수업으로 이 수업엔 학생들이 팀으로 직접 광고 포스터를 제작해보는 과제가 있었다.


학생들의 과제 발표 수업이 있던 날, 익숙한 "꼬레아"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행사 포스터 제작을 맡은 한 팀이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홍보한다는 콘셉트로 포스터를 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포스터를 보니 내적 대환장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 친구들의 설명에 의하면 "동양적인 미를 느낄 수 있는, FAN-CINE 홍보 포스터에도 이용되었던 무늬"인 욱일기 패턴이 색깔만 파란색으로 바뀐 채 포스터에 이용되었다.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도 못하고 부끄러움도 많은 나지만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을 기다렸다. 평소엔 먼저 말도 잘 안 하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동양인 교환학생이 대기하고 있다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교수님은 꽤나 놀란 듯하셨다. 잘하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떠듬떠듬 이야기한 내용을 적어보자면 "학생들이 이용한 것은 일본이 이용한 욱일기라는 깃발이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했을 때 이용되었던 것으로 많은 아픔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나치 표식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좋은 커뮤니케이터가 되려면 광고 타겟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광고가 재생산되는 것을 막고 싶다." 정도였다. (손짓 발짓과 구글 번역기가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구글 번역기 최고)


교수님은 찬찬히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답해주셨다. (뭐... 상처까진 아니었는데 상당히 미안해하셨다.) 그리고 나의 바람대로 발표 수업의 마지막 날, 욱일기에 대한 설명과 광고인으로서 필요한 자세 등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정작 해당 학생들은 자신들의 과제 점수가 깎일까 노심초사하며 "저희는 파란색 썼는데엽?"이라고 답하기에 없던 고혈압이 생길 뻔했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어렵더라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부디, 욱일기가 멋지고 쿨한 디자인으로 계속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며, 다음에 스페인에 왔을 땐 욱일기를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스페인 친구들을 잡고 떠듬떠듬 설명을 한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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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jenn
    • 글 잘 읽고갑니다. 제가 만약 에디터님의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교수님께 욱일기에 대한 의견을 잘 정리해서 말하신거 정말 용기있고 멋져요. 저도 나중에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좀 더 용기를 내보고자 합니다. 남은 교환학생 생활 화이팅 하시구 좋은 글도 또 올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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