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순간의 아름다움 : 빼기의 여행 [도서]

글 입력 2019.04.0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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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내게 그렇게 친숙한 존재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맛 집이나 볼만한 곳, 추천 코스 따위를 검색하고, 여행 루트를 짜고, 시간을 촘촘히 나눠 일정을 계획해나가는 것은 한량 같은 내게는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버거운 일로만 여겨진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귀찮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런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다’다. 끈적하고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가만히 서서, 밀려오다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파아란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종종 바다를 보러 여행을 떠난다. 계획도 없이 '일단 그냥'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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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일, 빼도 박도 못하게 20대 중반이 되어버린 역사적인 첫 날. 이틀 전에 숙소만 예약해놓은 채로 대책 없이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기차도 예매해놓은 시간에 타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덕분에 역에 앉아 허기진 배를 달랠 수 있었으니까. 정해진 게 없으니 우리에겐 남겨진 시간도 충분했다.

우리는 이미 함께 강릉에 와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그곳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바닷가니까 이번에는 조개나 회를 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길거리에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순간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눈을 마주쳐 생긋 웃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 순간을 참 좋아한다. 우리는 그렇게 강릉에서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삼겹살을 먹었다.



이동이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는 행위라면, 여행은 목적지에 닿기까지 가능한 우회하는 시도이지 않을까.


도서 <빼기의 여행> 17p



책을 읽다 이 문장에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빼기의 여행 :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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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여행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겉표지에 적힌 ‘대책 없이 느긋하고 홀가분하게’라는 말이 꼭 내가 생각하는 여행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급한 마음이나 부담감 따위는 없이 정해지지 않은 곳으로 돌고 돌아가는 그런 시간들.



평소보다 스케줄이 많은 날에는 먼저 초콜릿부터 구입하는 습관이 있다.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연이은 회의와 미팅, 몇 건의 통화와 교통체증 사이마다 하나씩 꺼내 먹으면 기운이 나곤 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초콜릿만큼이나 달고 강력해서 사는 데 때때로 도움이 된다. 무엇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내일을 기약할 힘 정도는 얻을 수 있다. 나는 여행에서, 생활의 가장자리에서 그런 기억들을 알뜰살뜰 줍고 다닌다.


도서 <빼기의 여행> 74p


<빼기의 여행>은 광활하고 압도적인 절경에 대한 휘황찬란한 묘사나,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의 유쾌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지 않다. 지도 한 장과 펜을 손에 쥔 채 난생 처음 보는 교토 마을을 돌아다니고, 별다른 목적 없이 그저 나무를 보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떠나는 작가는 지친 일상에 진정한 여유를 선사하며 작게나마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만 누군가는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는 반면, 어떤 이는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발견한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이고 기억하며 오래도록 음미한다.


도서 <빼기의 여행> 87p


여행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의 원화나 광대한 그랜드 캐니언의 협곡, 역사를 간직한 웅장한 콜로세움-따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손을 맞잡고 위풍당당하게 들어갔던 강릉의 삼겹살집과, 바위 끝에 멍하니 서서 파도를 바라보던 아침, 그런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던 네 모습과 집으로 돌아오던 기차의 차창 밖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까지. 그 모든 게 한데 모여 여행이 된다. 그곳에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얼렁뚱땅 들어간 런던의 한 펍에서 축구 경기를 보며 먹었던 애플크럼블의 졸인 사과 냄새, 오키나와의 허름한 다다미방에서 당신과 안주용 스낵을 하나씩 까먹던 날의 구수하고 쿰쿰한 바닷마을의 냄새, 마주보고 누워 잠든 당신의 발바닥을 쓰다듬으며 비바람을 걱정하며 편지를 쓰던 아이슬란드에서의 새벽. <빼기의 여행>에서는 이러한 시시콜콜하면서도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모든 순간에 행복이라 이름을 붙인다. 지친 우리에게 위안을 건네는 듯이.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오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어제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오늘의 내가 깨달았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야가 한 뼘쯤 넓어졌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도서 <빼기의 여행> 228p



물론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좀처럼 내주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우리는 더 나은 여행을 하려 더욱 열심히 계획을 세우곤 한다. 빡빡한 일정에 몸과 마음이 지쳐버리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이면 극도의 스트레스에 다다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순간을 즐길 여유가 없어져버렸으니, 여행이 아름답게 느껴질 리가 있나.

<빼기의 여행>은 책에 쓰인 표현 그대로 ‘쉬려고 떠났다가 피로만 떠안고 돌아오는 여행자에게 건네는 작은 휴식’이다. 조금은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 우연히 만난 모든 순간이 이제껏 만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될지도 모르니.

​​

*

간만에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행복을 만끽한 사소한 모든 순간에 대한 글도 끄적이고 싶어졌다. 가끔 바쁜 일상에 지쳐 여유가 필요한 내게 휴식과 원동력 같은 기록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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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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