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혜석 거리를 걸으며 [사람]

글 입력 2019.04.09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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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핫플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수원역’과 ‘인계동’이 떠오른다. 특히, 인계동은 온갖 유흥거리가 집결되어있어 20대의 주 활동영역이기도 하다. 나와 친구들 역시 맛집이나 술집을 갈 때 거의 인계동에서 만난다.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만나기 전 무엇을 먹을지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맛집 정보를 공유하는 건 필수 과정이다. 우리는 가장 배가 고플 새벽 때쯤 자연스럽게 초록창에 ‘나혜석거리 맛집’을 검색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계동에 600m 정도 거리로 조성된 ‘나혜석거리’에 맛집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혜석거리에 가자고 하며 나혜석거리를 인터넷에 검색하고 나혜석거리를 간다. 이렇듯 수원에 거주하거나 수원이 주 활동지인 사람에게 ‘나혜석’이라는 이름은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막상 ‘나혜석’이 누구이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묻는다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 신여성’이라는 짤막한 타이틀 하나만 떠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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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은 날은 낮에 나혜석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였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수많은 불빛들로 빛나는 밤의 도시의 모습만을 봐왔기 때문에,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나혜석 거리는 처음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나혜석 동상이 햇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 동상을 제대로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나혜석’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이 인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스스로 주장해왔으면서, 정작 수원문화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그녀를 모르다니. 그녀의 동상으로부터 받은 이질감과 자기반성. 이는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 알아갈수록 이제는 ‘나혜석’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졌다.




주장하는 여자, 나혜석 (1) 여성 해방을 주장하다



나혜석은 조선 최초의 신여성이자,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으며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고 서구의 신진문물과 지식을 조선에 전파하고자 한 작가이자 문화번역가였다. 이처럼 나혜석의 타이틀은 화려하고 다양하지만 그녀를 나타낼 수 있는 종합적인 타이틀을 고려해본다면, ‘주장하는 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게는 수동적인 삶만을 허용하고 강요했던 조선시대에서 그녀는 일생을 거쳐 저항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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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실제 사진


"여자는 작다. 그러나 크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강하다."


나혜석, 「삼천리」, 1935. 6



먼저 나혜석은 '여성도 이혼할 권리가 있다' '여자도 사람이다' '정조는 취미다' 등 굉장히 파격적인 발언과 글로 항상 논란의 화두에 섰던 여성인권운동가였다. 이토록 강렬하게 조선여성의 인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유학생활과 해외생활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태어나 우수한 성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을 가 서양화를 공부했다.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첩을 들이는 것에 의문을 품었던 그녀는 일본에서 현모양처를 바라는 한국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한 ‘이상적부인’이라는 글을 써 큰 화제를 일으켰다. 더 나아가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여성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인권 운동에 힘썼다고 한다.


세계여행을 한 후에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과 서구 여성의 생활상을 상세히 서술하고 서구의 젠더의식과 규범에 대해 국내에 소개했다. 문화를 읽는 데에는 수동적, 부차적, 반복적 읽기가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격정적 읽기를 수행하는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나혜석의 일본 유학과 서구 체험은 조선과는 다른 도시를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주체’로서 조선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이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 이였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나혜석 「이혼고백장」 中



그녀의 진보적 여성관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것은 그녀가 남편 강우영과 이혼 후 ‘실험결혼론’과 ‘이혼 고백장’을 발표했을 때였다. 그녀는 당시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도 이혼할 권리’를 주장하며 어떤 결과가 벌어져도 위자료, 정조유린 등 법적문제를 삼지 않는 ‘시험결혼론’을 내세웠다.


‘이혼고백장’에서는 자신의 불륜을 솔직하게 밝히고, 같은 외도를 저질러도 여성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며 모든 죄를 물게 하는 남성중심사회를 비판했다. 또한, 남편이나 본부인을 어떻게 하지 않는 범위 안의 행동은 죄도 아니라는 등 대담하고 당돌한 결혼관이 담겨 있었다.


당시 나혜석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남편 역시도 외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비난은 나혜석에게 쏟아졌고 위자료 역시 한 푼도 못 받고 무일푼으로 쫓겨났다. 뛰어난 실력으로 유망한 예술가로 인정받았지만 예술 활동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자신의 자녀들 역시 남편의 반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결코 여성인권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작품 활동과 강연을 통해 여성의 가사노동과 명절노동을 비판하며 여성의 사회생활, 교육, 사회참여, 성(性)해방 등을 촉구했다.


 


주장하는 여자, 나혜석 (2) 미술의 진보를 주장하다




같은 예술 중에도 문학이나 음학(音學)은 매우 보급이 되어 문예잡지도 생기고 음악회도 가끔 열리나 유독 그림만 이렇게 뒤떨어진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올시다. 대체 다른 예술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마는 이 그림에 대하여는, 예전부터 ‘그림을 그리면 궁하니…’ 그림 그리는 사람은 ‘환쟁이’니 하여 너무 학대와 천시를 하여 왔으므로 자연 여자는커녕 남자들도 이것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이가 드물었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기는 힘은 부치고, 재주는 변변치 못하나 쉬이 단독 전람회를 열고, 아무쪼록 일반 부인계에서 많이 와서 구경하여 주도록 하여 볼까 합니다.


「회화(繪畫)와 조선 여자」, 『동아일보』, 1921. 2. 26



나혜석은 여성관뿐만 아니라 미술에 대한 관념을 진보시키는 데에도 노력했다. 당시 조선시대에서 미술에 대한 인식은 편협하고 낮았으며 서양화는 더더욱 접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여성  화가는 거의 없었으며 여성 화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유학을 다녀온 후 자신이 배운 서양화 기법과 미술 관련 지식과 사상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하고자 했다. 또한, 그녀는 조선 여성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고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미술을 감상하는 법, 미술지식 등을 소개했고 미술과 관련된 다수의 평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녀는 서양화의 관심을 높이는 것을 넘어 미술 자체의 인식 수준을 높여서 미술의 보급화를 이루고자 했다. 이는 기존 천시했던 미술 인식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장하는 여자, 나혜석 (3) 독립을 주장하다




나는 변변치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시지 않습니까? 무거운 짐을 여러분에게 짊어지우기 위하여 나는 다만 새벽녘에 우는 닭이 되려 할 뿐입니다. 한 걸음 앞설 만한 길잡이가 되어야 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따로서 가기까지의 작은 지팡이가 되면 그만, 그만한 영광이 다시없을 따름입니다. 나는 가냘프지만 여러분은 굳셉니다.


화실의 개방-여자미술학사, 「삼천리」



종종 나혜석을 ‘친일파’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 나혜석은 파리에서 친일파로 몰려 파리에 있던 한인들에게 냉대를 받은 것이 서러워 대성통곡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친일’로 몰리는 것을 매우 견디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힘썼기 때문이다.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워 3.1운동을 준비하고 3.1 운동에 참여했다. 운동 도중에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 되어 5개월간 투옥생활을 치르기도 했다. 뉴욕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그린 ‘두 천사와 범’이라는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또한, 실제 친일은 저지른 사람은 나혜석의 전남편 강우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륜사건으로 인해 강우영의 친일 사건은 그대로 나혜석에게 덮여졌다. 심지어는 강우영이 ‘친일파 처단’을 내세운 김용하에게 면도칼로 찔린 사건도 나혜석이 강우영을 청부테러한 사건으로 탈바꿈되어버리기도 했다. 여성에게 너무도 불리했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나혜석은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친일을 저지르고 남편을 살해하려 했던 악녀’가 된 것이다.


그녀에게 이러한 타이틀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독립을 원했고 이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또한, 애초에 그녀가 주장했던 여성인권은 조선여성의 해방을 촉구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열심히 미술을 전파하려 했던 것도 조선의 예술인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선이 근대적 사상을 받아들여 개척하고 발전하기를 바랐었다.




선구자였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쓸쓸한 죽음




누군가 밖에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한 여인이 서 있었어요. 손짓을 해서 다가가니 ‘진이야, 내가 누군지 알겠니. 가까이 보니까 아버지를 빼닮았구나’ 그러세요. 누구냐고 물으니 ‘내가 네 어미다’라고 하시더군요. 울면서 계속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혼이 달아나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았어요. 수업종이 울려서 꿈꾼 듯 멍하게 교실로 돌아갔죠.


<둘째 아들 김진의 회고>



나혜석은 당대의 규범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변화를 주장하는 선구자였다. 그러나 ‘불륜녀’라는 꼬리표는 그녀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버렸다. 그 과정에서 극도의 정신쇠약으로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증세도 보이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하고 강연을 하며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만년에 파킨슨 병, 관절염, 중풍에 걸리게 되고 그녀의 여성인권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험하게 여긴 조선총독부의 감시까지 더해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또한 자녀를 몹시 그리워했음에도 전남편 강우영의 반대로 자식들을 보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 처했음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폭언과 조롱을 퍼부어 결국 나혜석은 종적을 감추고 후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당시에는 신원미상에 원인은 실어증, 영양실조, 중풍 등으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나혜석은 근대로의 이행을 위해 존재하는 기존 담론들과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다. 그녀의 행보만 보더라도 그녀는 추앙받아 마땅할 매우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녀를 쓸쓸하게 홀로 죽게 만들었고 죽음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왜곡은 계속 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실제 수원박물관에서 친일논란이 있는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규정했다고 논란이 일기도 했으며, ‘문화인물’로 선정하는 과정에서 나혜석은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했다고 반대했다는 문화관광부 자문위원들의 발언이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 중에서는 나혜석의 행보와 업적은 모른 채 그녀를 ‘불륜녀’정도로 인식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혜석은 기념비적인 인물임에도 나혜석 거리에 서있는 그녀의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는 수원을 대표하고 있지만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인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아직 나혜석의 자료와 작품들이 많이 발굴되지 못하고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앞으로 나혜석의 위상을 높이고 면모를 드러낼 수 있도록 나혜석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에 따라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높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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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윤정 (2014). 식민지 근대의 문화번역과 신여성. 나혜석연구, 4, 189-230.

이상경 (2016). 기억과 기록 사이에서 나혜석 말하기. 나혜석연구, 9, 165-183.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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