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때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친절과 무시는 한 끗 차이

#오늘의 멍때림 #전단지
글 입력 2019.04.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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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멍때림 #전단지



얼마 전 지인에게 혼이 났다. 길거리에서 할머니가 나눠 주시는 전단지를 받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저 할머니들 저거 다 나눠줘야 가신단 말이야.” 지인이 말했다. “나도 알아.” 내가 대꾸했다. “그래서 옛날엔 다 받았어. 근데 언젠가부터 저걸 안 받아야 길거리에서 전단지가 아예 사라지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

전단지는 무용하다.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선 말이다. 전화하기도 귀찮아서 어플로 치킨을 배달시키는 시대다. (언젠가는 AI가 주문해줄 지도 모른다.) 전단지를 보고 뭘 주문해보거나 어딜 가본 적이 생전 없기에 대체 저걸 왜 돌리나, 항상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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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쓸모가 없는 게 아니라 전단지는 쓰레기가 된다. 가만 보면 10명 중 9명의 사람들은 전단지를 내미는 전투적인 손길을 전투적으로 무시하며, 겨우 누군가의 손에 쥐어 진 전단지 10개 중 9개는 또 그대로 땅바닥으로 낙하한다. 결국 길거리는 형형색색의 전단지로 물들고, 결론적으로 전단지는 쓸모 없다. 전단지 때문에 희생되는 나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땅바닥에 버려져 밟히기 위해 베어지는 건가. 무력하다.

주려는 자와 받지 않으려는 자의 1초 간의 싸움. 이 갈등은 여의도 5번 출구 앞에서 극대화 된다. 한강을 배경으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줌마들은 약간 닌자 같다. 조준의 정확도가 날카롭기 그지없다. 쓕- 줬다가 쓕- 빠지고 쓕- 줬다가 쓕- 빠진다. 그 칼을 일단 한 번 맞으면, 게임 끝이다. 앞 뒤 양 옆에서 닌자가 우루루 몰려온다. 아예 처음부터 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두 손을 주머니 안에 봉해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전단지가 주머니 안으로 비집고 들어올 때도 있다. 돌아보면 닌자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인정하자. KO패다.

전단지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최근 일이 아니다. 버려진 전단지로 인해 더럽혀진 관광지, 길거리의 모습은 종종 뉴스에 등장한다. 이렇게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버려지는,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다지 보지도 않는 전단지를 계속해서 돌리는 사장님들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해서 자영업자들이 활동하는 몇몇 카페를 돌아다녀 봤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단지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미미한 수준이다.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감히 추측해본다. (여의도 쪽은 효과가 좀 크다고 한다. 그러니 닌자가 출몰할 수 밖에.)

그렇다면 이번엔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비단 그 뿐일까. 겨우 쥐어 준 전단지가 곧장 바닥에 버려지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 역시, 꽤 자존심 상할 테다.

길을 가다 보면 전단지 프로바이더(?) 중 어린 학생들도 종종 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어른들의 흐름 속에서 전단지 한 무더기를 안고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을 이리 저리 돌리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걸음을 멈추면서도 받아갔던 적이 많다. “감사합니다.” 전단지를 건네는 학생들의 손길은 항상 누구와 다르게 수줍었고, 난 그 감사하다는 인사에 기분이 좋아진 채 갈 길을 갔다. 과거의 내가, 보지도 않을 거면서, 전단지를 꼬박 꼬박 받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아마도 그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이들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왜 닌자는 안쓰러워 하지 않았지? 닌자 역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투명인간 취급 당하고 있는데?



#도움



요즘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 책을 소재로 하는 모 채널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유럽에 갔을 때 인상 깊은 걸 봤다. 휠체어를 탄 채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 분이 있었다. 기사님이 내려 발판을 꺼내 주시더라. 근데 그 표정과 행동이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였다고 생각해 봐라. 멋지게 미소 한번 씩- 날려주고, 약간은 오버스럽게 도와주지 않았을까. 헌데 그 기사님은 옆에 사람이 후추 건네 달라고 했을 때 건네 주는, 딱 그 정도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발판을 꺼내 주시더라. 그 기사님에게는 장애인이 도움을 줘야 할 대상이 아닌, 그저 너무나 당연하게 같이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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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는 행위는 한국 사회에서 착함으로 인식된다. 친구를 잘 도와주는 어린이에게 착한 어린이 상을 주는 것을 시작으로 도움과 배려는 고귀한 행위로서 우리에게 학습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생각해보니 일방적인 도움만큼 잔인한 것이 또 없다. 지금껏 내가 어른들을 통해 배워왔던 ‘도움을 준다’는 개념에는 필히 상하관계가 전제되어 있었다. 도움을 주는 쪽이 상, 받는 쪽이 하. 혼자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어주면 그건 도움을 준 것이었고, 몸이 불편한 친구를 챙겨주면 그건 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혼자 있는 친구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상태인지, 몸이 불편한 친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인지 따위는 그 누구도 짚어보지 않았다. 그저 나의 시간과 돈과 힘을 쪼개 ‘불쌍한’ 이를 ‘정상’의 범주로 끌어올려줬으니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대체 어떤 근거로 그들을 불쌍하다고 감히 여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정상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

만약 내가 어제 힘든 일이 있었다면. 해서 오늘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면. 헌데 웬 애가 자꾸 다가와서 말을 건다면. 만약 내가 선천적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다면. 그래도 그동안 최선을 다해 나름의 방식으로 몸을 활용하는 법을 익혀왔다면. 헌데 웬 애가 갑자기 와서 내 휠체어를 밀어준다면. 짜증날 것 같다. 그리고 초라할 것 같다. 나의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홀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친절이라는 이름 앞에서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의 수요를 먼저 묻지 않은 일방적인 친절은 자기만족을 선사하는 무시일 뿐이다.



#선한 의도만으론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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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켤레를 팔 때마다 빈곤국 아이들에게 자동으로 신발 한 켤레를 기부하는 One for One 마케팅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제품이 있다. 바로 TOMS 슈즈이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인 CSR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며 착한 기업 신드롬을 몰고 왔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TOMS는 치명적인 문제 상황에 맞닥뜨린다. 신발 제조 산업. 그것이 빈곤국의 주 산업이었음을 TOMS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TOMS의 공짜 신발은 현지에서 생산된 신발에 대한 수요를 떨어뜨렸다. 빈곤국 입장에서 본다면 막말로 신발 만들어 겨우 벌어 먹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웬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국에서 기부의 이름으로 공짜 신발을 무더기로 투척한 셈이다. 이게 뭔 봉변인가. 그 결과 TOMS의 매출은 하향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빈곤국의 산업구조 역시 무너져 버렸다.

이 상황에서 비롯된 말이 바로 ‘선한 의도만으론 충분하지 않다.’이다. TOMS가 빈곤국을 괴롭히려고 One for One 모델을 도입한 것은 아니었을 테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사례는 선한 의도가 의도치 않은 악을 불러올 수 있음을, 때문에 도움이라는 것은 주는 사람의 시선이 아닌 받는 사람의 시선에서 고려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선한 의도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도움 주기는 배려보다는 자기만족에 가까우며, 도움 받아진 이를 연민의 표상으로 대상화할 뿐이다.






내가 전단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얼른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길 바랐기때문이다. 헌데 난 왜 수줍은 고등학생의 전단지는 나서서 받았으면서 전투적인 닌자의 것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이라고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덜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누구는 보다 적극적이고, 누구는 보다 미숙하고. 내 마음의 문을 연 건 단지 그 차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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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의 이미지를 프레이밍해, 친절을 빙자한 자기만족을 취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오늘 인식한 이 수많은 전단지의 흔적은 길고 긴 의식의 흐름을 거쳐 마침내 이런 의미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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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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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황햠
    • 오늘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청각장애인으로 오해한 할아버지께 "세상은 아직 아름다워요!힘내세요!" 라는 말을 들었다는 글을 봤어요. 그 글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는데 딱 이거네요 ㅠㅠ 왜 항상 장애인들에게 힘을 내라고 할까요. 장애인들을 같은 사람이 아닌 동정해야 할 힘을 줘야 할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겠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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