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사건이 끝났다는 생각에 대한 경고 - 7번국도

글 입력 2019.04.13 23:4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19-04-03 11;46;13.jpg
 

어느 정치인의 수행비서로 근무하며 정치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한 여성의 주장이 지난해 미투 운동의 물결과 함께 등장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 피해 사실을 쉽사리 믿어주지 않는 여론 가운데 그는 이름과 얼굴을 모두 드러내며 뉴스에 출연했고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가 뉴스에 출연한 후 여론을 달궜던 것은 진취적인 정치적 스탠스로 인기를 끌며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까지 한 남성 정치인이 정작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되었다는 사실보다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인터뷰어인 앵커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않아 진실성이 의심되며, 말하는 것이 연기 같고, 뉴스에서 밝힌 성관계의 거부 방식이 부적절했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완벽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선 갖춰야 할 조건이 많았다. ‘피해자답지 않은’ 모습은 그의 폭로가 거짓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보탬이 되었다.



피해자다운?


‘가해자는 그럴 수 있어도 피해자들은 그러면 안 된다.’ 피해자는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환상은 대부분이 무결하지 않은 사람 중 피해자만을 드러냈고 덕분에 피해자를 위축시키며 가해자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더욱 이상한 건 피해자의 흠이라고 지적되는 것 중 흠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피해자답지 않은 깔끔한 모습, 피해자답지 않은 밝고 쾌활한 모습, 피해자답지 않은 맹렬함과 과격함, 피해자답지 않은 금전적 보상 요구….

타인의 피해가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며 위험을 회피하려는 본능은 피해의 원인과 규모를 미시적인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자세로 이어진다. 이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피해를 본응당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오로지 피해자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본능에 기대어 본질을 잃은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피해자 이미지는 그 이미지에 맞지 않는 피해자들을 배제하고 2차적인 가해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완벽한 피해자를 요구하며 사건의 본질에서 이탈하고 피해자 흠집 내기에 매진했던 역사는 유구하다. 미투 운동이 그랬고, 세월호 사건이 그랬고, 소개할 극의 소재인 삼성 백혈병 사건이 그랬다. 피해자를 탓하는 가해자 중심의 시각은 정치와 기업 등 각종 기득권층의 논리로 무장하고 언론의 여론몰이에 힘입어 사회에서 여전히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부분 강자와 약자가 나눠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대립이었으나 기계적으로 중립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약자가 흔들림 없이 강자와 상대하길 바랐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jpg
 
남산예술센터에서는 오는 4월 17일부터 28일까지 시즌 프로그램 <7번국도>를 통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피해자다움의 환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떤 형태로 압박과 폭력을 가하는지 살핀다. 특히 ‘삼성 백혈병 사건’과 ‘군 의문사’를 다루며 사건을 사실적으로 조명하고 여러 층위에 존재하는 갈등을 담아내어 사건에서 발생한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닥친 비극과 맞닿아 있음을 역설한다.


강원도 속초, 7번국도 위. 동훈의 택시에 군복을 입은 주영이 오른다. 그는 얼마 전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초등학교 동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동창의 죽음을 두고, 주영은 안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다.


이 낯선 군인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는 동훈은 바로 그 죽은 초등학교 동창의 엄마다. 동훈은 오늘도 경기도 수원의 공장 앞 1인 시위를 위해 집을 나선다. 하지만 남편인 민재는 동훈을 막아서고, 시위에 함께했던 용선은 피켓을 내려놓는다.


주영이 동훈의 택시에 다시 오른다. 이 낯선 택시 기사님은 주영에게 말한다. 이제 시위 나가는 것을 그만뒀다고. 때가 됐나 보다고.



삼성 백혈병 사건은 삼성 반도체 작업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씨를 시작으로, 같은 작업장에서 같은 질병으로 사망한 사례가 더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직업병임이 밝혀지고 기업과 피해자 간 법정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2018년에 양측이 모두 수용한 조정안이 나왔지만 최초로 인식된 피해자인 고 황유미 씨의 사망 사실이 무려 11년 전인 2007년에 알려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고 11년 동안 피해자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권력 집단의 공세와 그들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떠올리면 이는 사회적으로 계속 탐구되어야 할 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품이 다룬 또 하나의 사건인 군 의문사 사건은 단일 사건이 아닌 보편의 사건을 통칭하는 것으로 지금도 그 실체가 어둠 속에 감춰져 요원하다. 군인이 폐쇄적인 군대식 문화 속에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문제는 여러 번 제기됐으나 금방 가라앉고 말았다.

이 두 사건은 구성원의 죽음으로 집단의 문제를 드러냈다는 점뿐 아니라 강자와 약자와의 대립이라는 점, 사건의 속성을 규정하는 권한이 권력 관계에 따라 불평등하게 쏠렸다는 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확성기를 갖다 대야 할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는 점 등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편의를 위해 피해자의 영역을 축소하고 공익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 모두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가 낳은 비극으로 설명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7번국도_연습사진_(c)이강물 (6).jpg
 

사건의 내막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놀랐던 것은, 주체만 바꾸면 근래 일어났던 굵직한 시사 사건들과 거의 동일한 전개로 흘러갔다는 것이었다.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똑같은 가해, 똑같은 피해가 똑같이 고쳐지지 않은 사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연극이 극적 장치에 집중하기보다 사건의 사실적인 전달을 우선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라기보다 현재 진행 중인 사실과의 대면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고이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코 개인의 책임으로 지울 수 없는 거시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자에게 귀속시키는 방법은 간편하기야 하겠지만 어김없이 실재하는, 더욱 불어난 크기로 다가오는 위협의 돌진을 막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피해자다움’의 허구적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7번국도
- 남산예술센터 2019 시즌프로그램 -


일자 : 2019.04.17 ~ 04.28

시간
화, 수, 목, 금 19시 30분
토, 일 15시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
서울특별시

주관
서울문화재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90분





전문필진.jpg
 

[조현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