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력의 맛 -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

연극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 리뷰
글 입력 2019.04.1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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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어진 식사, 낯설어진 음식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에는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주된 공간적 배경도 작은 시골 마을의 백반집이다. 그러나 흔히 떠올리는 정겨운 모습은 아니다. 다른 존재의 죽음으로 삶을 이어 간다는 점에서는 먹는 행위도 폭력적일 수 있다.

연극은 먹는 행위와 인물들이 겪은 폭력을 묘하게 연결한다. 재희는 비엔나 소시지를 접시에 쏟아부으며 성재에게 과거 그가 자신에게 시켰던 것처럼 개 흉내를 내며 먹으라고 이야기한다. 재영은 재희에게 비엔나소시지 볶음을 내주며, 예전에 어머니가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아버지가 좋아하는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에 락스를 탄 적이 있다고 덤덤히 이야기한다. 또한 재영은 성진, 재희와 함께 밥을 먹으며 아버지를 밀어 바다에 빠뜨렸다고 털어놓는다.

음식이 등장하는 연극은 연극이 끝나고 그 음식이 먹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누구나 알고 있던 음식의 익숙한 맛은 연극을 통해 낯설어진다.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폭력이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밥 먹는 일만큼 흔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연극 말미, 피를 묻히고 돌아온 성진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넌지시 묻는 재영의 모습이다. 결혼할 사람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묻는 장면일 뿐인데, 앞서 재영의 어머니가 한 일을 떠올리면 서늘하다. 이는 재영이 폭력에 이미 익숙한 사람이며, 밝은 미래를 꿈꾸면서도 언제든 자신이 당할 수 있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 곳곳에 자리한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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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 각자는 폭력의 피해자다. 재영은 오랜 시간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어머니의 일을 이어받은 후에는 마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성희롱까지 당했다. 재희는 군대생활 내내 선임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했으며 성진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이들이 사는 마을 역시 재개발을 둘러싸고 마을 주민들과 건설업자 측이 부딪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설사는 용역을 고용해 마을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재영이 여자라는 이유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다. 재영은 동생인 재희가 군대에서 당한 일에 대해 '맞을 만했다'고 말하며 '그냥 숨기고 살라'고 말하는 등 그의 성 지향성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진은 다름아닌 재희를 괴롭히던 군대 선임이었고, 재희는 엄마와 누나가 아버지에게 맞는 동안 방관했다.

개인적으로 재영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 폭력을 다른 사람들의 폭력과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재영의 경우를 제외하고도 이들의 폭력은 조금씩 결이 다르다. 폭력도 언어폭력과 신체적폭력으로 나뉘며,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방관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고민을 하다가, '모든 폭력은 나쁘므로 사라져야 한다'는 납작한 결론을 피하고, 폭력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기 위한 연극의 장치로 이해했다. 연극은 특수한 상황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폭력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 X같은 놈들과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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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 없는 폭력에 굴레에 갇혀 있는 이들이 계속하는 것은 '구분 짓기'다. 자신의 폭력은 정당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구분 짓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별, 성 지향성, 집안 형편 등등 '맞을 이유'는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때론 자신이 당했던 폭력이 자신이 행하는 폭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의미 없는 논쟁이다.

그 구분 없음은 성진이 밖에서 시위를 하던 중 용역을 때려 온 얼굴과 손에 피를 묻히고 들어왔을 때 극대화된다. 언뜻 보기에 성진이 흘린 것처럼 보이는 피는 사실 성진이 다른 사람을 때리는 과정에서 묻은 것이다. 그는 또다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옥신각신 하던 중 그 피는 재영과 재희에게도 묻는다. 똑같이 피를 묻힌 세 사람은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 속에서 좋든 싫든 폭력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는다. 맞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때리거나, 최소 방관해야 하는 처지다.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옥신각신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폭력의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방관한 적도 없는 사람은 흔치 않다. 우리는 폭력의 굴레 속에서 어른이 된 채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마음 편히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X같은 놈들'을 쉽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와 그들은 그렇게 뚜렷하게 칼로 무 베듯 구분이 되는 존재일까? 우리는 폭력이 용인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작은 톱니바퀴일지도 모른다.



바깥을 향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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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현실을 절망적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재영, 재희, 성진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각자 지금 자신이 속한 곳을 벗어나 바깥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연극에서 그 탈출구는 모호하게만 그려진다. 재희는 캐나다에 산다는 형에게 돈을 송금하지만 그는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재영은 푸드트럭 장사를 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상태이며, 성진은 언제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잡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극이 시작되며 제시되었던 인물들의 욕망은 끝날 때까지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이라는 가정만 있을 뿐이다.

수많은 '만약'은 과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재영의 아버지 같은 가정폭력범이 정당한 처벌을 받는 사회였다면, 재영은 아버지를 살인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이후 가해자가 된다는 논리는 위험하지만, 성진 역시 학교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에서 살았다면 재희가 성소수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다른 선택지를 집어 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곳에라도 제동장치가 걸렸다면 그들의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재영은 동성애자인 자신을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재희에게 '여기 사람들은 그런 거 배려하고 봐 줄 여유가 없다'는 식의 대사를 한다. 그 대사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세 사람 역시 '여기 사람들' 에 속해 있으며, 폭력적인 세상을 이루는 일부이다. 이들이 바깥으로 나간다고 원하는 미래를 맞을 수 있을까? 그들이 속한 내부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바깥'이 되어줄 공간은 없을 것이다. 바깥으로 나가도 그 바깥을 자신이 있던 곳과 비슷하게 만들어가며 또 다른 바깥을 찾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연극 속의 세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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