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봄의 인디스페이스에서 - 칠곡 가시나들 [영화]

글 입력 2019.04.17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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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영화관 ‘인디스페이스’를 SNS에서 팔로우 한지는 꽤 되었다. 작년 상반기엔 출국 전까지 하도 정신이 없어 가볼 생각도 못했고, 해외에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그 동안은 이 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마음에 담기만 했었다. 그러다 올해 귀국하고 충정로 근처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인디스페이스와 꽤 가까운 거리까지 생활 반경을 넓히게 되었고, 그제서야 줄어든 물리적 거리만큼 이 곳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길 만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영화관 SNS 계정에서 ‘국경의 왕’ 개봉 소식을 접하게 된 날 나는 영화를 예매했고, 퇴근 후 만원버스에 몸을 싣고 드디어 인디스페이스에서 첫 번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실 종로면 집에서 그다지 먼 곳도 아닌데 한 번 가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한 번 가고 나니 이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바로 예매하거나 영화관에 찾아가는 추진력이 생겼다. 일이 이렇게까지 쉬워진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면 아마 쿠폰일 것 같다. 인디스페이스에서는 적립금 대신 종이 쿠폰에 도장을 찍어준다. 커피 전문점처럼, 열 개를 모으면 한 편을 공짜로 볼 수 있다. 공짜 영화라는 보상 때문만이 아니라, 쿠폰을 내밀면 꾹 찍히는 도장이 여기까지(자랑은 아니지만 멀리 안 돌아다니는 내가) 온 게 기특하다고 칭찬하는 것만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다. 또 이 곳은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구하기 힘든 종이티켓으로 발권을 해 준다. 한 마디로 매우 아날로그틱한 곳이다.

인디스페이스는 상영관이 하나뿐인 작은 영화관이다. 서울아트시네마와 같은 건물에 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처음에 갔을 때 티켓에 상영관 번호가 없고 자리 번호만 있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실은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설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아이맥스나 4D 영화들이 상영되는 대형 상영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2D영화들을 보기엔 아무 부족함이 없다. 좌석도 넓고, 의자마다 새겨진 후원자들의 이름 중 유명한 영화 감독이나 배우들의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좋은 점은 상영이 광고 없이 정시에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지각쟁이도 경각심을 가지고 제 시간에 오게 된다. 시간이 남으면 1층의 관객 대기실도 이용할 수 있다. 책자와 포스터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이 노다지를 캘 수 있는 곳이다.

올 해 들어 부쩍 더 좋아하게 된 공간인 인디스페이스에서, 3월엔 세 편의 영화를 봤다. 오늘은 그 중 ‘칠곡 가시나들’에 대해 조금 두서 없이 써 보려고 한다. 처음엔 CGV를 보이콧했다는 감독님의 인터뷰를 통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할머니들을 가시나들로 표현한 것을 보고 대체 어떤 가시나들일지(…) 궁금해져서 바로 보기로 마음먹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일단 보러 갔던 그 때의 마음처럼, 편안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이다.


<칠곡 가시나들>
: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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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시나들’은 칠곡에 사는 팔구십대 할머니들이 한글 배움 학교를 다니면서 벌어지는 일상 이야기이다. 자식들 다 키워 독립시키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생일대 과업이라 할 수 있는 일을 진작에 끝마친 할머니들의 일상은 단조로울 것 같지만 상상 이상으로 활기차고 역동적이다. 가는 곳마다 보이는 간판을 읽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담긴 첫 장면이 보여주듯, 할머니들의 생활은 글자를 배운다는 설렘과 열정,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물론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똑같아서, 할머니들도 숙제를 하기 귀찮아하고, 가끔 컨닝도 하고, 둘을 배우면 하나를 까먹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도 모두들 계속해서 배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출석하는 모습이 흐뭇했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마 함께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이라는 동료가 있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칠곡의 일상을 함께하며 마음으로 가까워진 친구들. 할머니들이 배웠던 부분을 아무리 틀려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만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화를 내거나 무안하게 하지 않고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좋은 선생님.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잘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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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할머니들 한 명 한 명의 사연이나 그들이 쓴 시를 간략하게 보여주며 각자의 인상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억지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할머니들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느낀 바를 그대로 전한다는 느낌이 든다. 나도 보면서 다 뚜렷하게 외우지는 못했지만 노래 자랑 대회에 나간 두조 할머니나, 선생님이 약을 사 들고 찾아갔던 금분 할머니, 사랑에 대한 시를 쓴 월선 할머니에 대한 인상이 참 오래오래 남았다. 평소에 보던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도 이처럼 각인되는 것이 참 신기했다. 개성 있는 할머니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상황은 또 어찌나 웃기던지… 두조 할머니의 노래대회를 응원하러 가는 길, ‘풍문으로 들었소’를 배경음악으로 다 같이 걸어가는 모습이 아주 위풍당당해서 빵 터졌었다.

잔잔한 일상 사이로 속속 등장하는 시들도 정말 매력적이다.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다져 온 내공이 있어서인지 가장 단순한 단어로도 멋있는 시들을 써 낸다. 너무 진솔한 감정이 담겨 조금 슬프기도 한 시들도 있지만, 그조차도 길고 긴 생을 살아 온 사람의 인생론이라 생각하니 겸허해진다. 그래도 희로애락은 다 똑같구나, 느낀 건 낮에 반주하고 물 튀기며 즐거워하는 할머니들을 봤을 때. 혼자 지내는 일상이 약간은 외로워 보이다가도 소풍날 같을 땐 다들 신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교복 입고 민망해하면서도 장기자랑 열심히 하는 모습이 고등학생 때 한복입고 부모님들 앞에서 춤췄던 하던 나와 친구들 모습 같다고 느꼈다.

노래자랑에 나갔던 두조 할머니의 이야기도 마음 속에 오래오래 남는다. 젊었을 때 가수를 하고 싶었던 할머니는 마을 노래 대회에 나간다. 할머니는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나갔고, 순서가 되자 마이크를 받아 들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호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작은 규모의 대회가 아니었던 만큼 실력자들이 많았고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조 할머니는 약간은 실망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떨어진 것에 대한 미련은 금방 털어버리고 다시 일상의 즐거움을 찾는다. 열정만큼은 1등인 두조 할머니와, 응원하러 찾아온 ‘칠곡 가시나들’이 함께 걸어가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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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디어가 그려내는 전쟁 세대 할머니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면 역사의 풍파를 경험하며 살아 남은 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지키는 가신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의 삶은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로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구십 살 할매들도 희로애락은 똑같이 느낀다는 것,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하고 고마운 사람의 그림을 그려 주고 때로는 귀찮아서 숙제를 미루고 친구가 아프면 슬퍼하는, 기쁨 슬픔을 가감 없이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그 뿐일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고, 칠곡의 할매들은 시대로 인해 잃어버린 공부의 즐거움을 늦게나마 찾아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고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네이버 클립 중 ‘칠곡 가시나들’을 보러 영화관에 간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영화관에서 본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니, 오래 살면 이런 일도 있구나 싶으셨을 것 같다. 빨리 죽어야지 싶다가도 즐거운 일이 생기면 살아야지 싶다는 할머니가, 스크린에 나온 본인 모습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하시는데 티끌 하나 없는 웃음이라 코끝이 찡했다. 소녀 같다는 수식어의 식상함이 실례로 느껴질 만큼 해맑은 모습이었다. 후회나 미련, 원망은 옛날옛적에 내려 놓은 것처럼, 다른 게 끼어들 틈 없는 그 순수한 마음을 배우고 싶다. 그 마음 한 조각 담긴 박금분 할머니의 시를 인용하며 마치겠다.


내 마음

                              박금분


빨리 죽어야 되는데

쉽게 죽지도 안하고 참 죽겠네

몸이 아푸마 빨리 죽어야지 시푸고

재밌게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왔다갔다 한다


-칠곡 가시나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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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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