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좀 더 희망차고 활기찬 연극을 기대했어 - 2019 세월호

여유로움이 바라는 <겨울의 눈빛>
글 입력 2019.04.1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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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1번지]2019세월호 포스터_웹용.jpg
 


<겨울의 눈빛>은 이제껏 내가 봤던 연극과는 조금 달랐다. 공연장이라고 크게 적혀있지도, 배우들이 근사하게 연기를 하지도 않는 그런 연극.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곳에 공연장이 있었다. 명확한 표지가 없어서 10분 일찍 도착했음에도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를 찾지 못해서 지각을 해버렸다. 만약 친구가 먼저 가서 서 있지 않았다면 공연을 관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극장관계자분과 친구가 쏟아지는 비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해주시는 지하로 정신없이 내려갔다. 친구에게도 미안했고, 나를 기다려준 배우분들과 관객분들에게 너무 죄송했다. 겨우 한 시간짜리의 연극인데 나 때문에 시작도 못 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그냥 사라져버리고만 싶었다. 그런데 마침 비어있는 자리가 맨 앞에 동떨어진 자리여서 더 신경 쓰였다. 매우 어색하게 앉아있는데, 내 옆에는 배우분이 앉아계셨다. 어떤 배우는 지하로 푹 꺼진 땅에 앉아있었고, 또 어떤 배우는 극이 한참 진행 중에 관객의 자리에서 갑자기 나왔다. 그쯤 되니 누가 배우고, 누가 관객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


정면을 향해 진행되는 그런 일방적인 극과는 다르게, 지하 곳곳에 자리 잡은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대본을 읽었다. 아주 평범하디 평범한 누군가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지금의 '나'.


부산 해운대 가까이 살았던 누군가가 그리워하는 영화관, 소매가 길게 늘어진 윗옷을 입은 그 누군가는 소매를 툭 떨구어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영화관에 입장하곤 한다. 그 누군가는 아주 조용하지만, 감독과의 회식 자리에서 어느 부분이 별로였는지를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떤 남자와 같이 잠을 자도, 정말 그냥 잠만 잔다는 그 사람. 서로 등을 맞대고 누워있다. 그 사람은 외투를 그대로 입고 침대에 누워있고, 자신도 원피스를 입고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잔다. 아침에는 같이 식사를 한다. 식탁에 앉아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며 먹는 식사가 아니라, 그 사람들만의 식사를.


공허한 삶이었다. 들려주는 대로의 삶이라면, 왜 사는지 모를 그런 삶을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잘 되어간다는 이야기에 알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는 그런 삶. 고향도 사라져버린 그런 삶.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는 이야기도 아닌 정말 그냥 살아만 있는 삶.


극은 반전이 없고, 담담했고, 글솜씨 없는 사람이 쓴 수필처럼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다. 아무 감정 없이 읽는 배우들은 무엇을 위해 이 공연을 열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더 바빴다고 할까. 관객이 잘 보이는 자리였기에 그들을 관찰한 시간이 사실은 더 많았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어떤 사람은 앞을 지긋이 쳐다보고, 어떤 사람은 나처럼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람과 몇 번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희망차고 알차고, 다시 삶을 살아갈 의지가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연극 속에서도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애인은 외친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이런 게 아니라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다른 거라고. 하지만 그 말조차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을 만큼의 평범한 사람이 바라는 극적이고 생동감 있는 영화를 바라는 평범한 인간들.


내가 연극을 본 건지,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지루한 신세 한탄을 들은 것인지 헷갈리는 그런 한 시간. 만약 그런 술자리였다면, 때려치우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찌질하고 비굴하고 나까지 부정적이고 무기력함이 전염되는 그런 사람의 일기.


마치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 뒤에서 그냥 백색소음을 없애기 위해 웅성거리는 소리 같은 것. 카페에서 중요한 볼일을 보기 위해 앉아있는데, 배경으로 틀어주는 유행가 같은 신세 한탄.


*


그런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는 평범함을 담은 것은 사람들에게 '왜 나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써서 왔는데 뭘 듣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과 동시에, 거기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능동적인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사람의 일상을 듣는 이유는 무엇인가. 친구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라면.


생각해보면, 다른 이의 일상을 엿볼 때는 매우 많다. 지인의 SNS는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라서 블로그를 자주 보는데, 블로그에는 사진과 짧은 글,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느낀 점이 담겨있다. 유튜브 동영상 VLOG를 보기에는 시간이 조금 아깝고, 그렇다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은 조금 가볍고, 읽어내릴 수 있는 블로그가 가장 재밌기도 해서 보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왜 타인의 삶을 그렇게 엿보려고 할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나는 매우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역시 아닐 것이다. 만약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목표라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니까. 심심해서, 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심심하면 다른 행동도 할 수 있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자신이 사는 방식이 다른 이들과 닮고 싶은 이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내일도 그렇게 살도록 하는 자극을 받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면 다른 이들이 행복해 보이기에, 그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행동을 관찰하고 따라 하기 위해서.


*


연극이 진행되면서 가끔은 맨 앞에 놓인 스크린에 글자가 비치고, 글을 읽는 배우분이 그 글자를 읽는다. 글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의 중요한 부분을 순서대로 조금씩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보여준다. 한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말처럼 보여줄 것은 보여주고, 숨길 것은 숨긴다.


낯선 누군가의 일기. 그 사람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조차 모르는데도, 그리고 연극 내내 그 사람에게선 어떤 삶에 대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데도, 마지막까지도 그 사람은 똑같았지만 그런 평범함이 그 사람을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다.


그리고 또 느끼는 건, 그런 것이 평범함이라면 나 역시도 평범해질 수 있다는 것. 상담선생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가진 '문제'는 사실, '문제'라고 부를 정도로 큰 것은 아니라고.


*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극에서 말을 하는 '그 누군가'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사고가 일어났던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괜찮음을 강요한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로 괜찮아야 할 것을 강요한다.


저번 <비엔나소시지 야채볶음> 연극에서 그랬다. "그런 걸 이해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니?"라고. 나는 사람이 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해주느냐고 비난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알 것도 같다.


새로운 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재건축 현장에서는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람들도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겠지만, 기구 하나의 이름만 잘못 말해도 쌍욕을 듣는 그런 곳이었다. 10가지 정도의 지시사항을 이해하지도 못하게 빠르게 말해놓고, 나중에 한 번 더 물어보면 걷어차이는 곳이었다. 집을 떠나서, 점심 뷔페에서 한 달 치의 식권을 끊어두고 배를 채우고, 다시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그런 살벌한 세계.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받았을 때 나 역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내가 가장 힘든 일을 겪었고, 누구보다 힘든 인생을 살았다고 동정해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사랑해달라고 하는 철부지였다. 저번 달에 월급을 받았다며, 새로 산 체크무늬의 재킷을 입고 아이보리 색깔의 때 묻지 않은 산뜻한 구두를 신고 출근한 직장에서,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를 신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1층으로 걸어 나오지도 못하고, 지하 1층으로 밖으로 나가 점심 뷔페로 갔다. 나는 아침으로 편의점에서 1,500원짜리 세척사과와 1,900원짜리의 감동란을 샀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후식으로 아메리카노와 빵으로만 7천원을 썼다. 그런데도, 폭식증에 대해 고민해왔던 스스로가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 사람들을 끊임없이 신경썼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업하던 노트북을 집어던지고 집으로 돌아와 숨어버리고 싶었다.


세상에는 '어떤 살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을 제외한 여유'를 생각지도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실은 그들이 입은 작업복과 작업화가 우리 아빠의 것과 똑같아서. 며칠전에 메일로 PDF 파일을 다운받아서 인쇄하는 방법을 물어보는 아빠의 전화를 받고, 캐드로 도면을 출력할 줄 모르니 PDF 파일로 일일이 만들게 시키는 작업 소장에게 화를 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누가 누구에게 여유를 따지고, 더 큰 의미를 담은 위대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바라는건가.


고향을 잃고, 친구를 잃고 자기가 가진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고를 겪었는데도, 더 활기차고 위대한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건가, 하며 깨달은 나의 허영심과 오만함.


*


어쩌면 <겨울의 눈빛> 연극은 그 공허함과 상실감이 너무 큰 나머지,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어서 목소리만 남겨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보고 봐도, 여유 있는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또는 이미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음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연극은 눈을 감고 이미지를 상상하며 들어야 할 게 아니라, 나처럼 눈을 뜨고 뭐가 언제 나올지 기대를 하다가 공연이 끝날 때쯤 허무하게 돌아가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참사와 사고, 각종 사건, 그리고 그 일들을 겪은 피해자와 겪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 그리고 '여유 있는 사람들'. 상실과 추억과 권태와 무감각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여전히, 그 모든 일을 가장 안전한 자리에 앉아서 지각이나 하며, 감상하고 비판하고 있는 나.


*


집에 돌아와서 안 사실인데, 나는 그날 렌즈를 한쪽만 끼고 갔다. 렌즈를 빼려고 보니까 한쪽눈에 렌즈가 없었다. 10분동안 눈알을 뒤지며 렌즈를 찾다가, 인터넷에 렌즈 빼는 법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풍기 바닥부분에 렌즈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6개월짜리 투명렌즈라서 잃어버린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난 그날 한쪽눈은 마이너스 3.5인 채로, 한쪽눈은 1.0 가까이 되는 최상의 상태로 연극을 보고 온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고, 불편함이 없었다. 렌즈를 낀 쪽 눈이 조금 이물감이 느껴져서 거꾸로 꼈나 생각만 들었었다. 공연을 보고, 친구랑 이야기하며 혜화까지 왔다갔다하는 시간을 합하면 3시간 남짓, 어떻게 그걸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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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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