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극 속으로 사라진 사람

연극 '함익' 리뷰
글 입력 2019.04.2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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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과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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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지만 오늘날에도 계속 무대에 오르는 <햄릿>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연극 <함익> 역시 <햄릿>이 바탕이다. 마하그룹 재벌2세 '함익'이 2019년 대한민국의 햄릿이다. 그는 햄릿이 그러했듯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으나 과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그는 친어머니의 죽음이 새어머니와 아버지의 탓이라 여기며 복수를 갈망한다.

시작부터 갈등을 내포한 상황과 극이 진행될수록 그 갈등이 커져 결국 파국에 이른다는 점은 원작인 <햄릿>에 충실하다. <햄릿>에서 햄릿이 연극을 만들었듯, <함익>의 함익도 자신이 교수로 있는 연극학부의 연극을 지도한다. 일종의 극중극인데, 그 극중극은 다름 아닌 <햄릿>이다. 연극학부의 <햄릿>연습이 1막부터 5막까지 서서히 진행됨과 함께 함익의 이야기도 한발씩 나아간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자연스레 관객이 <함익>으로부터 <햄릿>을 환기하고 연극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

극중극 <햄릿>은 함익의 광기를 잘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다른 학생들에게 <햄릿>은 그저 많고 많은 고전 중 한 작품이고, 심지어는 졸업하기 위한 과제일 뿐이기도 하다. 연우조차 <햄릿>을 다른 작품보다 각별히 아낄 뿐, 현실에까지 <햄릿>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평범한 대학생인 그는 엄연히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러나 함익에게 극중극 <햄릿>은 자신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햄릿 이야기를 단순히 연극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로 받아들인 함익은 학생들이 만드는 <햄릿>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려 든다. 급기야 교수의 위치가 아니라 배우의 위치에서 연우와 동시에 연기를 하기에 이르는 함익은 연극과 자신의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함익, 햄릿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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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극인 <햄릿>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함익은 계속해서 햄릿이 되기를 자처한다. '햄릿으로 태어나 줄리엣을 꿈꾸다'라는 홍보 포스터의 문구처럼, 그는 연우에게 흔들리지만 애써 뿌리치고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햄릿으로 돌아간다.

이 극을 함익이 햄릿과 줄리엣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로 본다면, 함익은 결국 햄릿이 되며 연극이 끝난다. 새어머니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친어머니의 시체에 매달려 웃고 있었다는 원숭이에게 복수하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햄릿>은 원래 비극이다. 그러므로 함익이 원한 게 햄릿이 되는 것이었다면 그는 성공했고, 그래서 함익 자신에게 이러한 결말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극 <함익>은 관객이 함익의 입장에서만 극을 바라보게 두지 않는다. 홀로 방에 있을 때면 분신인 익을 불러내 대화를 나누는 함익은 과거에 사로잡혀 복수를 고민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는 재벌 2세에다가 대학생들의 연극을 지도하는 까칠하고 독단적인 교수, '얼음공주'일 뿐이다. 함익이 자신의 분신과 대화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함익의 비극에 몰입한다. 마치 1인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함익과 익의 대화를 제외하면 함익의 어머니가 새어머니 때문에 죽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므로, 함익의 망상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러므로 함익과 익의 대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돌변해 원숭이를 죽여버린 함익의 모습은 불안정한 정신상태에 있다가 자기파멸에 이른 재벌2세일 뿐이다. 함익의 자아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면 이 이야기는 함익이 햄릿과 줄리엣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아니라 연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연극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특별하지도, 유효하지도 않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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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이라는 인물 개인의 차원에서 보는 <함익>과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 보는 <함익>의 간극이 존재하는 까닭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비극의 의미도 변했기 때문이다. 본래 비극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이야기 양식이 아니었다. 비극은 고귀한 이야기로 여겨졌기에, 무대에 올라 '비극'이 될 수 있던 삶은 귀족이나 왕족, 신들의 삶이었다. <햄릿> 역시 덴마크 왕자가 주인공으로 왕가에서 일어나는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힘들고 슬픈 이야기가 무대에 오르는 '시민비극'이 생겨난 지도 벌써 300여년이 다 되어간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저마다의 비극을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풀어놓으라고 말한다면 그 가운데 비극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오늘날의 비극은 이미 보통 사람의 일상 속에 자리하므로, 세익스피어 시대의 비극만큼 특별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

비극이 흔한 시대에 함익은 자신만의 비극에 집착한다. 함익이 줄리엣이 될 것인지 햄릿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바탕에는 자신의 비극을 특별히 여기고 끔찍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햄릿을 연출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너희가 비극에 대해 뭘 아느냐, 비극은 평범한 사람은 가질 수 없다. 너희는 무대 밖에서는 모두 엑스트라일 뿐이다' 라고까지 말하는 함익의 모습에서 집착에 가까운 비극 사랑을 볼 수 있다. 이는 극 후반부에 갑자기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비정규직 문제나 등록금 문제 등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모습과 대조된다.

다소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했던 이 장면은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비극이라 여기는 함익의 생각과 달리, 세상에 비극은 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미 비극적인 세상에서 재벌2세의 비극은 특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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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는 비극에 갇힌 함익을 바깥 세상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꼭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안내자로서도 말이다. 그러나 함익은 자신을 현실의 입구로 안내하는 그를 거부한다. 대신 그가 하는 연극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바꾸려 들고, 극중극과 자신이 속한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바깥의 현실이 아닌 자신의 자아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분신 익과 손을 잡고 뒤돌아 천천히 퇴장하는 모습에서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슬로우비디오처럼 옆으로 쓰러져 사라진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함익과 익 두 사람 뿐이다. <함익>은 연극에서 시작해 연극으로 끝났다. 연극은 삶을 모방하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자신만의 연극에 갇힌 함익은 연극을 곧 삶으로 만들어버렸고, 그 속으로 사라졌다.





함익
- 서울시극단 정기공연 -


일자 : 2019.04.12 ~ 04.28

시간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3시, 오후 7시
일 오후 3시
(월 공연없음)

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티켓가격
R석 50,000원
S석 30,000원
A석 20,000원

주최
(재)세종문화회관

주관
서울시극단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1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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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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