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을들의 당나귀 귀' -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페미니즘 렌즈로 대중문화 읽기
글 입력 2019.04.2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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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부끄러운 고백부터 하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완전히 무지했으며,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상황 자체를 피하곤 했다. 모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본인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한 사람이 잘 이어지던 대화를 갑자기 중단시키고 화를 내어 모임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순간을 몇 번 목격하다보니, 페미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진 몰라도 사회성이랑은 거리가 먼 부정적인 학문이라는, 정말 한심하고 멍청한 생각을 했다. 참 부끄럽다.


페미니스트는 정말 ‘프로 불편러’일까? 내가 만났던, 그리고 미디어나 책으로 접했던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은 항상 화가 나 보였다. 법과 제도에, 상황과 현실에, 사람과 미디어에 화를 내고 불편함을 한껏 표출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의 외침을 처음엔 듣지 않았다. 그저 저들은 ‘프로 불편러’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피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게 계속되자,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항상 불편해하고 화를 내는 걸까?


*


그렇게 페미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할 생각조차 없던 나를 드디어 페미니즘에 입문하게 만든 영화가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다. 박찬욱 감독은 대중성부터 예술성까지 아우르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작가주의 감독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명성 높은 명감독이다. 그런 감독 본인이 직접 페미니즘 영화라며 <아가씨>를 내놓았고, 나는 엄마와 함께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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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고 극장에서 걸어 나오면서, 굉장히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게 여성영화인 걸까? 정말? 분명 이 영화의 서사는 두 여성의 연대가 가부장제를 이겨내는 것이다. 남성 캐릭터를 희화화하고 풍자함으로써 더욱 여성영화의 성격을 띠려고 노력한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인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몇 장면이 아닐까.


이 영화의 원작인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와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BBC 드라마 <핑거스미스>, 그리고 <핑거스미스>의 모티프가 된 캐롤 앤 더피의 시 ‘Warming Her Pearls’ 모두 레즈비언의 사랑과 성을 아름답고 성스럽게 묘사했다고 느꼈는데, <아가씨>는 그저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에 그치는 기분을 느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한 여성으로서도, 이런 불편함을 느끼면서 도저히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 반대로, 그럼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냐는 물음에도 시원히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모르는데 페미니즘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 리가. 그때 처음으로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함을 제대로 인지했다. 그리고 그제야 ‘여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문화콘텐츠 속에서 여성캐릭터가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여성을 대하는 태도, 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그때부터는 영화를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고,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잦아졌으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화가 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급기야 <위대한 쇼맨>과 같은 영화는 길 지나가다 OST만 흘러나와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태에 이르렀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느꼈다. 문화콘텐츠를 전공한 여성으로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렌즈를 끼고 대중문화를 봐야겠단 결심을 했고,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을들의 당나귀 귀>는 그런 나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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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의 당나귀 귀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한국여성노동자회, 손희정 기획


손희정, 최지은, 허윤, 심혜경, 오수경

오혜진, 김주희, 조혜영, 최태섭 지음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는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임윤옥이 진행을 맡고 문화연구자 손희정이 고정 패널로 출연해 각 회차에 맞게 엄선된 전문가 게스트 한명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속 시원히 말하는’ 방송이다. 이 책은 2016년 5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방송한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 시즌2, 3의 “대중문화와 젠더” 편을 선별 및 보완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남자들은 넘쳐 나고 여자들은 사라지는 세계”에서는 한국 예능의 현주소를 점검한다. 4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남 엔터테인먼트” 혹은 “아재 엔터테인먼트”와, ‘가부장-아버지’의 ‘생존 전략’인 ‘딸바보’ 서사를 다루고, 그 와중에 여성 예능인의 입지를 다진 ‘김숙’이라는 현상을 살핀다.


2부 “여성은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상품이 되는가”에서는 대중문화와 얽힌 여성 노동을 중점으로 이야기한다. 더 이상 ‘우상’이 아닌 걸그룹의 실태와,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 재현 방식, 여성 혁명가와 여공 문학, 그리고 ‘상품이 된 여성의 신체’를 신용사회와 금융, 성매매라는 주제로 논의한다.


3부 “재현하는 여성, 재현된 여성”에서는 영화 속 여성 재현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게임, 포르노,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로 대두되는 디지털 속 여성 혐오 문제를 조명한다.


*


나름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중문화를 향유하려고 애를 썼다고 생각했건만, 책을 읽을수록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깔깔거리며 즐겁게 향유했던 예능 프로그램, 울고 웃었던 드라마들이 전문가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해석으로 다시 보니 충격적이게도 대부분이 철저히 남성 중심 서사를 따른 것들이었다. 수많은 대중문화를 보고 자라면서 전반적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 이미 익숙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코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무엇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다행이다.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패널이 여러 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각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또한, 진행자인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임윤옥,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손희정과 함께 한 주제를 깊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활발히 토론한다. 덕분에 독자 입장에서는 여러 관점으로 대중문화를 읽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이제 한동안은 대중문화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될 것이다. 아마 웬만한 예능 프로그램은 아예 쳐다보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이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싶다. 마치 드디어 알에서 빠져나와 아브락사스에게 도달한 새가 된 듯, 한걸음 나아간 기분이다. 앞으로는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으로서, 종사자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대중문화를 ‘제대로’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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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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