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디디의 우산: 나의 대답

글 입력 2019.04.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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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은, 단지 나의 일상에 파열을 내기 위해서만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일상은 그저 가만히 있는 ‘나’란 존재를 부수는 게 단일의 목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단지 망치기. 기이하게도 거기서 ‘끝’이라는 편안한 종결 대신 다가오는 건 무심히 지속되는 시간을 담보로 한 잔인한, 그러나 천진한 얼굴의 물음이다. 그래서, 이제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호수에 던진 돌멩이가 만드는 물결이, 빙판을 깨부순 쇠막대기가 만드는 균열이 어찌 되는지 이제, 그려보라고.


2013년 가을, 신호탄을 쏘아 올린 후 겨울에 또 한 번의 징후를 보인 나의 균열은, 2014년 봄으로 연결되기 위한 전초전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 번 다 죽음이라는, 비슷한 듯 다른 소재로. 숱한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정확히 표현하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던졌다. ‘왜.’ 그 질문은 지금까지, 질문으로만 남아 있다. 대답을 바라는 마음은 현명한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그러게, 지금껏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주어지기는 했나. 객관화를 빙자한 경멸이었다. 어쩌면 포장지일지도 모를, 이것조차 벗기면 체념이란 속살이 덜덜 떨고 있을.


*


<디디의 우산>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어떤 사람의 죽음에 관해 오래 생각하다 보면, ‘죽임당한’ 것처럼 믿어졌다. 주변에 비슷한 모양의 죽음이 있기도  했지만, 어느 사람들 틈에선 아예 없기도 했다. 오직 나만이. 그건 꼭 “정교하고도 무자비한 핀셋이 집어 내던진 것처럼 오로지”(21) 죽음이 누군가를 선택한 것 같았다. 죽음 옆에 선 나도 선택받은 자였다… 무자비하게. “환멸과 혐오. 그것이 d에게 가능했다. 왜 안 되겠는가.”(47) 무자비함을 곱씹을수록 환멸과 혐오가 더 친근해지는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d에게도 있었구나. 어쩌면 ‘모두’에게.


 

-아이와 같이 산다는 건 매일 숱한 감정적 소용돌이와 아이의 흔적에 휩쓸린다는 거야.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잔뜩 있어. 내 아이가 엉뚱한 장소에 넣어둔 장난감, 이로 씹은 물건들, 아이 옷에 일어난 보푸라기들, 펼쳐진 그림책, 낙서들. 내 집에서 내 아이의 자국들을 볼 때마다 난 그 애들이 생각나. 나처럼 그런 걸 하나하나 목격하며 그 나이로 자랄 때까지 아이를 키웠을 엄마아빠들이. 그러니까 내가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처럼 내게 말하지 . 나는 그 일을 생각해. 그 사람들의 집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생각해. 그래서 말할 수 없어. 무서워서.

 

-아니 네가 무서운 것이 뭐냐고. 그걸 말하는 동안 네가 두렵고 상처받을 것이 무서워? 그것이 너는 무서워? 너는 그게 제일 무서워? (298)(299)

 


혹자는 아픔을 말하는 일을 무섭고 두려워하고, 혹자는 그 무서움과 두려움을 비열한 것으로 취급한다. 타인의 아픔의 원인을 묻는 일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자기연민으로 회귀하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여기서 무엇이 ‘옳은’ 대답인지 묻는 일은 폭력일 것이다. 그저, ‘커다란’ 죽음은 각자에게 대답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진저리가 날 정도로 산 자에게 들러붙어서는 멱살을 잡고 흔든다. 뭐라도 하라고, 말을 해 보라고.

 

나의 대답도 이제는,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 리뷰를 내가 나에게 대답하는 통로로 삼아 본다. 그런데…가능할까. 나는 아직도 아주 많은 대답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 사실 대답은 매번 바뀌었기 때문에. 이미 여러 대답을 지나온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거나. 때로는 그냥 울라, 울자, 하거나. 아니면 진짜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자. 그게 최선인 것 같다며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원해서 스스로라는 존재를 감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냐, 그러니 이런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날 이해해 달라. 태어나지 않는 편이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렇게 기도하고서는 그럴 수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 그랬지, 하며 허탈해하고.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28)은 인상을 나도 알고 있는데. “한번 일어났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일어난다.”(315)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텐데. 정말,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40)였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세계가 본래 상태였음을 깨닫는 게 인생의 종착지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냐. 존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취되어야 할 일이냐고, 그런 거냐고.…“그만하자.”(159)(161)(186)

 

다시, 대답에 집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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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사에서 세월호 사건 생존자에게 고인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는 질문에, ‘그냥 안아주고 싶다’는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소름이 돋았다. 아주 여러 번 상상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똑같네 나랑. 사랑했던 사람에게, 하고 싶은 하나. 그러나 마음을 다잡기를, 세상에 같은 죽음은 없지. 너희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 같을 리 없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은연중에 라도 이해하고 있다는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 애썼고 나는 절대 위로를 건넬 수 없다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상황과 맥락은 다르다는 이유로.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다 어떤 글을 보았다. 타인의 슬픔을 위하는 반응으로 “나는 모른다”는 태도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뭐가 다르냐고.


그럼 ‘어쩌라는 건가’… 생각하기를, 너희를 이해하는 마음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 믿으면서도 너희에 관한 많은 글을 찾아보았던 이유가 결국은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나. 너희의 기사를 볼 때마다 길에서건, 버스에서건, 집에서건 부끄럼 없이 울었던 이유가 그래서였나. 정치를 잘 모르는 내가 2016년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광화문 촛불 집회에 세 번을 갔던 것도 그래서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기로는, 같지 않나. 너희의 사람들이 죽었고, 나의 사람들이 죽었다. 아주 많은 조건이 다르지만, 이별해서 볼 수 없다는 슬픔에 애통하고 오직 나만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가끔 몸서리치곤 하는 대상 없는 혐오는, 같지 않나. 그래서 대답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은. d와 dd, 김소리와 서수경 그리고 정진원도…


처음에는 연극에서 소설 속 이야기 두 편을 교차한 구성이 방식적인 면에서만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적으로도 개인의 죽음과 ‘커다란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묘하게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다. 공개되지 않은 어떤 이의 죽음과 공개된 죽음들. 나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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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314) 이 질문에 대답이 어려운 이유를 혁명이란 믿음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면. 십여 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는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구호가 유행이었다. 그리고 오랜 후 설교에서 ‘이제 그 구호는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그 구호가 불가능해졌다고. 세상의 변혁, 혁명의 가능성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1987년 6월 항쟁, 1996년 8월 연세대 항쟁, 2009년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언제 끝날까. 언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니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모두가 돌아갈 때에는 우산이 필요하다” 이 문장을 대답으로 빌리고 싶다. 나는 아직 나의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나 보다. 혹은 말이 때론 하찮아서, 어떤 말을 해도 내 말 같지 않은가보다. 이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모두’라는 단어를 ‘너’로 바꿔 보았다. 뭔가 아쉬웠다. 다시 '모두'로 읽었다. 어쩌면 이 '모두'라는 단어는, 사실 ‘너’를 지칭하고 싶은데 지칭해야 할, 반드시 이 말을 들어야 할 ‘너’가 너무도 많아 ‘모두’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모두’는 그렇게 ‘반드시 지칭되어야만 하는 특정한 너’라고. ‘다수’안에 잠식되지 않는 개인성, 개인을 위한 마음이 담긴 단어가 ‘모두’라고.

 

2013년, 2014년을 겪으며 찾아온 큰 희열은,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비한 마음에서 비롯된 깨달음이었다. 어떤 강령처럼 다가왔다. 우습게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매해 절대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 강령은 산산조각 났지만. 오히려 어떤 사람을 이전보다도 더 강하게 경멸할 수 있게 된 것도 같고. 상처는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은,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는 말이기도, 이해와 반대되는 이면의 어두운 감정의 폭을 섬세하게 발달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는 의견을 낼 수 있다면.


그럼에도 모두가 돌아갈 때에는 우산이 필요하겠지. 내가 한때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너에게마저도. 다정(多情). 따뜻한 마음이다, 모두에게 우산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러나 왠지 죽음의 경험 이후에 얻어진 말이라고, 그래야 하는 덕목으로써 다정과 연대를 말하고 싶진 않다. 어떻게든 결론이 내려지는 글자에서, 나는 자꾸 길을 잃고 싶다. 이것은 2013년과 2014년을 겪은 이후, 겪었기 때문에, 생긴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대답이 필요한 곳에서 <2019 세월호-제자리>와 같은 공연도 하나의 대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과 같은 물음 앞에, 지속해서 지겨운 대답은 없다. 얻어지지 않으므로 자꾸 대답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이런 기획이 참 반갑다. 앞으로 상영될 다른 공연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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