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해체한다, 조각난 것을 듣는다 : 연극 "7번국도"

글 입력 2019.04.2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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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길을 잃은 그곳, <7번국도>


연극 <7번국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히스토리는 역설적이다. 하나의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벽돌을 빼내었기에 그렇다. 통상적으로 허구의 세계는 빌드-업을 통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간다. 없던 인물은 있던 것처럼, 여기 이곳에 없는 세계는 여기 이곳에 있는 세계처럼, 지어낸 대사는 진짜 주고받을 법한 말처럼 그렇게 현실을 닮은 픽션은 개연성과 핍진성을 확보하며 만들어진다. 그런데, <7번국도>의 타임라인은 뭔가 좀 다르다. 이 작품은 건물을 차곡차곡 지어 올려 멋지게 완공할 때 즈음 한 번의 위기를 겪는다.

때는 연습 5주 차 런쓰루 당시, 창작진은 공연이 ‘잘 가고’ 있는 듯함에서 위기감을 느꼈다. 무슨 소리냐고? 이 작품이 ‘잘 만들어진 연극’에 다다랐을 때 돌연 불편함을 느끼곤 모든 걸 뒤엎어버렸다는 거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무대 디자인을 맡았던 장호 디자이너도 비슷한 소회를 전했다. “극 중 인물들의 삶의 결들과 형상을 상상해 보려 했던” 그였지만, 차근차근 따라간 길에서 매번 길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7번국도>는 ‘잘 만들어진 연극’에서 길 잃은 창작진들이 이것저것을 덜어내어 다시 닦아낸 곳이다. 이곳은 왜 ‘잘 만들어지면’, ‘잘 가면’ 안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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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그 이유에 대해 구자혜 연출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희곡의 인물들은 분명, 지금 동시대 사회적 참사로부터 출발한 인물들이고 그것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붙여진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분명 존재하는 인물들. (중략) 연극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세계, 희곡이 이야기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7번국도> 프로그램북 중) 연출의 말마따나 <7번국도>는 한국사회에 실재했던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군 의문사 사건에서 출발, 피해자의 상황을 연극 안으로 끌고 들어오고 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인물을 꾸렸다. 그리고 ‘빌드-업’을 통해 허구의 인물,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인물간의 관계, 어떠한 결말을 만들어나갔다.

창작진이 부딪힌 점은 이것들이 ‘연극적’인 것으로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현실의 문제를 담은 연극은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을까? 모티브가 된 현실 모델의 문제를, 아니면 그림 안에 담고 있는 허구의 피사체를 연극은 끝까지 책임지어 말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결국 연극이 담아낸 게 ‘피해자의 진실’이 맞을까? 유동하는 물음은 하나의 정물화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연극이 담아낼 수 없는 세계', '희곡이 이야기할 수 없는 세계'가 분명 엄존하고 있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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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자, 그럼 다시 길 잃은 이유의 이유를 찾아. 연극이 담아낼 수 없는 세계를 찾아, 7번국도 어드메를 헤매다 보면 우리는 택시를 모는 동훈을, 택시에 타는 주영을, 또 택시를 잡아탄다는 군인 귀신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인물의 무력함과 연극의 무력함과 타인으로서 느끼는 관객의 무력함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알 수 없다. 타인이 느끼는 슬픔을. 그래서 역시 알 수 없다. 연극이 담아낼 수 없는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그들의 회의처럼 나는, 그들은 그리고 아마 다수의 관객들은 딸을 잃고 공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엄마의 심정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따돌림과 학대, 잔악한 폭력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 밖에 없었던 청년의 마음을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국가의, 기업의, 어떤 집단의, 한 인간의 폭력 앞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름의 생을 충분히 이해하고 헤아리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연극은 확신에 찬 말을 포기한다. 인물과 세계에 대해 관객보다 선행하여 알고 있다는 태도도 내려놓는다. 이곳은 우리 모두가 길을 잃은 곳, <7번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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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조각난 것을 듣는다


그렇다면 이 <7번국도>의 위치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곳의 지리적 위치를 밝히려면 대본상의 좌표부터 살펴봐야겠다. 희곡부터 이 작품은 ‘해체’에 기초하는 듯하다. <7번국도>는 자신이, 그리고 관객이 철저한 타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다움’이란 도상부터 해체한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피해자’의 이미지를 깨기 위해 작품은 여러 층위의 피해자를 내세우고, 피해자의 가장 작은 단위인 그들 개개인을 들여다보길 택한다. 천 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 개의 인생이 있듯, 천 명의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천 갈래 이듯, 작중인물은 모두 다른 시간의 총체다. 이들은 하나의 층위에 있지 않으며 하나로 묶여 설명되지도 않는다.

인물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하고, 그들의 가족이기도 하고, 연인이기도 하다. 누구는 “학교가 아닌 공장”에 있다가 죽었고, 좋은 대학에 다니던 누구는 군대에서 죽었다. 누구는 피해자의 어머니이고 누구는 아버지이며, 누구는 누나이고, 누구는 연인이다. 그리고 누구는 1인 시위를 하러 날 궂은 때에도 나가고, 누구는 나가지 않으며, 누구는 시위를 포기하고 보상금을 받아 치료비로 썼다. 또 누구는 싸움을 포기하고 누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다섯 개의 다른 삶은 사회에서 익히 통용되는 ‘피해자’란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다. 이들의 생은 '피해자'란 카테고리 내에서 동질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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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아울러 피해자 사이의 관계를 다룰 때에도 섣부른 연대와 이해를 말하지 않는다. 이들조차 서로를 ‘하나’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 여자친구인 기주가 왜 포기를 안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동훈, 공장이 아니라 학교에 갔다면 지영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영, 민재를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용선, 지영이 죽을 때 옆에 없었던 동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민재 등. 이 작품에서 만나는 모든 인물은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러는 서로를 “이상하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을 피해자란 양식에 가두고 “이상하다”는 말로 잣대를 들이대려는 제3자들과 다른 건, 그들은 서로를 단둘이서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희곡상에선 어느 장면에서도 인물 셋 이상이서 마주하지 않는다. 나와 너, 당신과 나, 단둘의 피아를 마주한다. 묶는다면야 같은 ‘피해자’란 군에 서 있겠지만, 그 안에서도 서로를 감히 대체할 수 없는 인물들.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서로의 사정을 듣는다고 해도 영영 이심전심이 될 순 없는, 타인에게 타인인 사람들. 그렇게 나는 나, 너는 너이지만 제3자에 의해 똑같은 표찰의 ‘우리’라고 묶이는 사람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너’를 마주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피해자가 마주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피해자. 그들이 7번국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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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이제 따져봐야 할 건 이 대본을 구현하기 위해 벽돌을 빼내었던 연출의 좌표다. 연출은 대본 이상으로 ‘해체’를 해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길을 잃은 창작진이 차를 몰아 도착한 <7번국도>엔 대본 이상으로 조각난 것들 투성이다. 인물과 인물의 관계는 물론이요, 배경과 무대, 대화는 더더욱 조각나 있다. 바닥에 잔뜩 널린 자동차 부품은 그 기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연출의 말처럼 "비선형적인" "시간성을 적극 들여”오면서, 한 시간 반의 연극이 감당하지 못하는 희곡의 상황을, 또 모티브인 현실을 역시나 가장 작은 단위로 해체한다.
  
인물들이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 곳은 부품으로 조각난 무대 위. 그곳은 희곡상에는 택시 안으로, 장례식장으로, 바닷가로, 집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무대화된 연극에선 눈으로 찾아볼 수 있는 지표가 단 한 가지도 없다. 구체적인 배경과 소품으로 배경 전환이 선명했던 희곡과는 달리, 연극은 인물의 움직임과 서로가 주고받는 대사만으로 공간과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인물들은 딱딱하게 굳은 몸짓으로 널린 소품을 축으로 삼아 무대에 입장하고(마치 팩맨의 움직임처럼!), 때론 서로 마주 보고 때론 마주 보지도 않고 어딘가를 배경 삼아 만난다. 그곳이 현실인지, 회상인지, 환상인지는 그들의 말소리에 귀 기울여야 겨우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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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그래서 관객에게 가장 극대화되는 건 ‘소리’다. 시각적 효과가 전무하다시피 한 무대에서 관객이 의지하여 따라갈 수 있는 건 인물 간의 대사뿐이다. 그런데 이 대사 역시 현실성에 정박하지 않는다.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하는 시간이 드물고, 서로를 향하는 인물의 대사는 오롯이 객석으로 쏟아진다.

배우의 톤은 또 어떠한가. 대다수 관객은 리액션과 이어짐을 통해 유려한 대화가 전해지길 기대하지만, 배우들이 내뱉는 쩌렁쩌렁한 대사는 단말마의 비명과 같다. 대사와 대사 사이는 어딘가 어긋나 있고, 큼직한 소리로 대사는 하나하나 객석으로 떨어진다. 모든 게 조각나 있는 <7번국도>는 그렇게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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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하나로 설명 불가능한 타인의 인생을 우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건 하나로 설명 불가능한 인생들이다. 그래서 어렵게 다가온다. ‘피해자’라는 도상을 통해 그들을 미루어 짐작한다면 그보다 더 쉬운 게 없을 것이다. 피해자의 학벌로, 피해자의 직업으로, 또 피해자와의 관계로, 사건 이후의 삶으로, 보상금 수령 문제로 진실성을 따지고 그들의 아픔을 쉽게 말하는 건, 정말 말 그대로 쉬울 것이다. 그럼 그렇게 맘대로 정의내리고 슬픔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그저 그렇게 인식하고 구석에 제쳐두며 다시 각자도생하기 위해 제 인생으로 뛰어들면 그만인 제3자의 위치에 대해. 그 쉽디 쉬운 위치에 대해.

이 대목에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타인의 슬픔”이라는 평론가 신형철의 지적을 떠올려본다. 우리네가 인간이란 존재인 이상, 타인의 슬픔은 내 것이 될 수 없고, 같은 자리에 서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에게도 바로 옆 자리 밖에 허락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심장은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타인의 슬픔과 마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혼자 하는 드라이빙”에 기꺼이 나와 다른 당신을 태우는 마음일 것이다.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서로를 대체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 옆에 서는 행위일 것이다. 타자의 자리에 선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는 생애, 그건 모든 게 해체된 '7번국도'에 있고 우리는 기꺼이 택시 안에 앉아 그곳으로 향한다. 우리 자신에게 “가장 어렵지만” “가장 소중한” 타인의 슬픔을 마주하기 위해, 배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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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어 프리로 진행됐던 공연 사진. ⓒ이강물


남산예술센터에서 마련한 배리어 프리 공연도 연극과 같은 맥락 위에 있어 뜻 깊었다. 이 배리어 프리는 구자혜 연출과 여당극의 제안을 수용하여, 남산예술센터에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많은 극장에선 청력이 평균 혹은 평균 이상인 사람, 시력이 평균 혹은 평균 이상인 사람, 거동하기에 어떤 어려움도 없는 사람을 ‘관객’으로 상정한다. 이 같은 기준을 통해 통용된 '관객다움'은 평균치가 되어, 극장의 기본값이 되어, 어떠한 관극 문화를 만들어왔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공공극장에서도. 그렇담 이 '관객다움'에서의 '관객'을 가장 작은 단위로 해체하면 어떠할까. 개중에는 기존의 극장 관습에선 보는 것에, 듣는 것에, 움직이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다.

남산예술센터의 김지우 PD에 따르면, 배리어 프리 공연을 준비하면서 공연 정보 안내, 예매 방법, 공연장 안에서의 안내 등 “그동안 해왔던 모든 일들이 전부 새롭게 다가왔다”고 한다. 기본값을 다시 설정하자 관행처럼 취급되던 것들이 다른 시선과 태도를 요한 것이다. 한 번 더 김지우 PD의 말을 빌려보자. “<7번국도> 배리어 프리 버전 준비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경험이 극장에게, 극단에게 또 관객에게 같이 쌓여나갈 수 있다면 배리어 프리가 그동안 연극계 관행이라 불리던 것들을 조금씩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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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공연 사진. ⓒ이강물


‘기본값’의 관객 중 하나였던 나. 내가 배리어 프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은 청력이 좋지 않은 가족이 뮤지컬을 보고 나온 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서 힘들었다. 더 잘 들렸으면 좋겠다”고 말한 날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괜히 “원래 다 그래. 다른 뮤지컬도 그래”라고 대꾸했지만, ‘원래’는 나 같은 기본값의 관객에게 맞춰져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매회 모든 공연이 그렇게 되기 힘들다면, 내 가족이 청력 문제로 힘들어하지 않을 회차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기본값에서 더 먼 사람들은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오혜진 문화연구자의 지적이 떠올랐다.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이라는 형식을 경유해서만 비로소 충만하게 경험될 수 있다”는 타인의 상실, 타인의 슬픔. 그렇듯, 타인의 인생이란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 다가가기 어렵고, 다가간다고 해도 완전히 자기화 시킬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내 차원에서 깨닫는다. 그리고 내가 나인 이상 배우고 느끼기 어렵겠지만, 그 슬픔을 배우기 위해 ‘7번국도’에 선다. 모든 게 파편화되어 있는 그곳, 나와 영원히 같지 않을 당신을 마주할 수 있는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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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 남산예술센터 2019 시즌프로그램 -


일자 : 2019.04.17 ~ 04.28

시간
화, 수, 목, 금 19시 30분
토, 일 15시

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
서울특별시

주관
서울문화재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90분





출    연

권은혜, 박수진, 이리, 전박찬, 최요한


스 태 프

작 배해률, 연출 구자혜
무대 장호, 조명 김형연
사운드 목소, 의상 우영주
조연출 및 음향오퍼 류혜영
자막오퍼 김효진, 조명오퍼 윤지영





*
참고
<7번국도> 프로그램북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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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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