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채로움을 사유하다, 데이비드 호크니 [시각 예술]

글 입력 2019.04.2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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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함에 멈춰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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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우연이었다. 단지 옆에 미술관이 있었을 뿐이다. 예술의 공기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끈다. 현실의 짓눌림을 단숨에 설렘으로 바꿔놓곤 한다. 짐이 너무 무거웠고, 많은 사람들 틈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작품의 연대는 시간 순이었을지라도 나의 시각은 산발적이고 싶었다. 그렇게 미술관이 안내하는 관람 순서를 반대로 하여 마주한 것이 ‘푸른 기타 시리즈’였다. 감히 표현해보길 이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사유의 총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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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예술가다. 홀로 작업을 하며 생각의 생각을 거듭한다. 사고를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는 관찰하고, 사유하고, 구상한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내는데 멈추지 않고 고민한다. 주어진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에 반발하고, 그것을 자연주의의 덫이라 명하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한다. 표현법의 시도는 사유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주제가 작품으로 실현된다. 세상을 보는 시점에 대해 고민한다. 가장 흔하고 익숙한 보는 것의 행위를 낯설게 바라본다. 그의 작업은 마치 과학자의 연구와 같다. 본다는 것은 정적인 사진의 이미지에 갇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호크니는 말한다. 인간의 시점은 수 천 개이며 계속하여 변하고 움직인다. 그는 이를 그림에 담아낸다. 과연 그럴까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넘어 어떤 대상을 새롭게 정의하는 방식이다. 깊이 있는 사유의 구현이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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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일까. 많은 기사들은 호크니가 1019억 작가라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예술의 본질일까. 호크니의 수식어는 왜 금액이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음악을 작품성, 대중성으로 구분하여 평가하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돈과 떼놓기 어려운 요소이다. 호크니의 작품성은 어떻게 대중성을 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의 그림은 감각적이다. 마치 이 전시회의 로고처럼 시선을 집중시킨다.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 혹은 다채로운 색감이 담긴 작품들이 유명하다. 한눈에 파악 가능한 것들이 사람들의 시선에 오래 남는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향유 가능한 것들이 체험적으로 만들어진다. 포토존, 노트, 폰케이스 등에 프린팅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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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예술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터넷으로 그림을 보는 것과 직접 전시회를 다녀오는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나의 경우 미묘한 질감 차이를 포착해내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처럼 단순히 그림을 소비하고 마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호크니가 의도한 색감을 직접 보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예술과 현대 미술에 대한 흥미가 반감되자, 미술관에서 으레 그렇듯 어떤 작품에 오래 머물러 보는 것이 이해 가지 않기도 했다. 관심과 지식이 덜한 나에겐 한 작품을 이리저리 계속 들여다볼 이유가 없었다. 가이드를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인지 공감하지 못했다. 신기한 것, 새로운 것을 한 번쯤 접하고 마는 것, 미술관은 내게 그랬다.

그러나 처음으로 다시 보고 싶은 작품들이 생겼다. 사람들의 줄에 떠밀려 지나치고 싶지 않은 작품들, 사유가 표현된 것들이다. 그 사유의 흔적과 발현을 작품에서 계속 찾아내고 싶었고, 거꾸로 작품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언제 멈춰 서는가. 고민을 할 때 멈춰 선다.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며 생각의 단계를 밟곤 한다. 다음의 작품들은 발길을 멈춰 서게 했다. 재 입장이 불가한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푸른 기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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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ade>


아무런 해설 없는 감상을 즐기는 편이다. 작품과 맨 먼저 마주했을 때의 오롯한 나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맞닿는 지점을 찾는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생각한다.

호크니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처음 보게 된 작품이다. 얇은 선과 오밀조밀한 시원한 간격, 뚜렷한 색감이 눈길을 끌었다. 서랍장 같은 곳에 놓여 있는 것들을 바라보다 제목을 보니 세레나데라 했다. ‘글쎄’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바라봤다. 정작 푸른 기타 시리즈의 푸른 기타는 맨 아래에 놓여 있다. 그림자인지 모를 것이 기타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늘어져있었다.

누구를 위한 세레나데일까. 이토록 계층적인 것이 세레나데일 수 있을까. 시공간이 왜곡되듯 맨 위층의 호수 같은 형체는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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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et>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마치 만화 같은 감각이다. 시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돌덩어리 같은 것들에서 다채로움을 보고, 색감에서 그의 그림자를 본다. 그에게 부스러기는 사고의 재료이다. 푸른 기타를 통해 어딘가에서 선율의 형태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이 모든 게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한 것이라면, 이것은 호크니의 자화상이기도 하겠다.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본다. 정형화된 것, 흑백의 것을 벗어나 이면의 빛깔을 본다. 아니, 이끌어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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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rd merely magnifies>


왠지 모를 것들이 한 데 모여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푸른 기타 시리즈답게 푸른 기타는 한 군데서 등장한다. 마치 꽃병의 그림자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푸른 기타였다. 그것의 주위엔 음표의 나열이 있다. 의자 옆에는 식기가 바닥에 놓여 있다. 쓸 수 없다. 인간의 형상과 동물의 형상은 의자의 방향대로 스크린을 향해있다.

스크린 뒤에는 창문 같은 것이 있다. 아니 벽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이름은 '과장되지 않은 부조화'. 이것저것을 빠르게 훑지만, 여러 번 봐도 어떤 연관성이 읽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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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with still life>


호크니의 선을 쓰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가벼운 터치와 뚜렷한 색감이 특징인 시리즈였지만 여기서만큼은 색이 흐릿하다.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의미를 함축시켜나가다 보면 응축된 추상적 표현만으로도 의미를 설명 가능하듯 그림도 비슷한 것 같다. 현실의 것들을 가장 잘 묘사하는 작가들이 추상을 시작할 때, 그 선에 의미가 가득 담긴다.

호크니가 붉게 표현해 낸 선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마치 동작을 슬로 모션 하는 듯 하기도, 저 사람의 날카로움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로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글과는 다르게 그림의 표현법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움직이는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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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눈이 움직일 때, 내가 보는 방식에 따라
시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대상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실제로 다섯 명의 인물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1천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데이비드 호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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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mbroke studio with blue chairs>


공간이 왜곡됐다. 어디가 천장, 어디가 거실, 어디가 테라스이고 벽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혼란스러움은 그림을 보는 각도를 조금씩 달리해보면 해결된다.

맨눈으론 안보이던 그림이 굴절 거울에 비추면 보이는 것과 같다. 고개를 갸우뚱해서 보면 호크니가 옆에서 바라본 방의 모습, 누운 듯이 위쪽으로 쳐다보면 누웠을 때 바라본 천장의 모습 등이 조화롭게 뒤섞여있다. 다양한 시점의 공간을 그는 2차원 평면에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고민의 결과물은 마치 피카소 같기도 하다. 실제로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실재의 세계는 3차원인데 그것을 2차원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왜곡의 시작이지 않을까. 손에 잡히지 않는 계속하여 유동하는 3차원의 세계를 영리하고 참신하게 포착해낸 호크니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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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other>


호크니는 붓이라는 도구에 멈춰있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들을 적극 이용했고, 나아가서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시간에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조각들이다. 정확히는 포토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 작품이다. 모두 다른 초점으로 찍었지만 한 인물이다. 눈이 사진의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훑기 시작한다.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 시각적으로 와 닿지 않아 더욱 시선이 머문다.

Eye tracker를 사용하여 사람이 화면 속에서 응시하는 것들을 기록해보면 눈의 초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당혹감이 우리가 인물을 보는 방식을 정확하게 표현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물결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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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l with two figures>


풍경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미술학원에서 질리도록 그렸던 수채화의 영향인지, 풍경화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이 수영장 시리즈는 뭔가 다르다. 그가 집중한 것은 뒤의 산과 자연물이 아니라 눈 앞의 물결이다. 그는 하루 종일 물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표현해내려 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현재의 시간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 커다란 나무에 달린 나뭇잎들이 바람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던 것을 기억 한다. 그것을 흘러가듯 보는 일반인과 작가의 시선 차이를 오늘에서야 느낀다. 그는 물결의 우연성을 포착하려 했다. 일렁이는 물결과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 마치 눈 앞에 물이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이보다 더 추상적으로 표현해낸 물결은 더욱 흥미롭다. 오히려 하나의 패턴처럼 느껴져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평면에 담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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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de>


다소 엄숙한 분위기,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한 편의 퍼레이드가 등장한다. 이는 시각에 초점을 맞춘 사람의 감각을 자연스레 청각으로 이동시킨다. 정적인 미술관을 단숨에 음악의 세계로 이끈다.

악보를 모두 채우지 못한 선율을 따라가 본다. 세 개의 음표로 쾅쾅거리는 퍼레이드 음악이 들릴 것만 같다. 이것은 그림인가 음악인가. 뭉친 실타래 같은 표현은 퍼레이드의 효과음을 나타낸 것 같다. 단지 서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아쉬운 작품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악보를 연주한 것을 들려주는 체험 존이 구성되어도 좋았을 것 같다.



유동하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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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한다. 자신의 사유를 토대로 그림을 창작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계속하여 사유하게 만든다.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자신의 시각으로 구현한다. 단순히 상업성만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유 덕분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작품들을 창조해나간다.
 
그의 사유는 유일하다. 그것을 표현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그의 예술은 단순히 색을 잘 표현해냄이 아닌 사유를 함이다. 감각적인 색채는 잠깐이지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새로운 모습과 깊은 생각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가서 닿는다. 이로써 그의 예술은 많은 이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것만이 아니더라도 호크니 재단에 들어가 작품들을 살펴보다 보면 모두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시도를 했음이 느껴진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또 새로운 관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호크니의 사고 과정을 따라가는 것, 그것을 표현해낸 것을 향유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재미있다. 그렇게 그의 사유는 예술이 된다. 변화하는 시대 속 고전 작품이 여전하듯.





*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중 <My Mother>과 <Parade>는 글의 작성을 위해 임의로 시리즈의 포함관계와 순서를 달리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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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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