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도서]

도서 7년의 밤 Review
글 입력 2019.05.01 20:0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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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작은 호수, 세령호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거구의 살인마가 열두 살 남짓한 여자아이를 목 졸라 살해하고, 아이의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자신의 아내마저 강에 내던진 뒤 댐 수문을 열어 경찰 넷과 마을 주민 절반을 수장시킨 것. 이 미치광이 살인마는 체포된 이후 덤덤하게 범행 과정을 시연해 내며 여론의 공분을 샀고, 결국 사형 확정판결을 받는다.


온 세상을 분노케 한 미치광이 살인마 최현수. 그는 한때 야구 선수였고, 세령댐의 운영팀장이었으며, 나의 아버지였다.




세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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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령호는 안개가 자주 끼는 음침하고 어두운 호수이다. 세령호에 건설된 세령댐을 중심으로 저지대마을과 사택이 갈리고, 그 사이를 3개의 공도교가 잇는다. 사택 뒤로 난 담장 뒷길과 구불구불한 호수 안길, 그리고 취수탑. 열두 살 세령은 바로 이곳에서 짙은 안갯속을 시속 120km로 질주하던 술꾼에게 희생당한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한다. 추상적인 표현이 배제된, 작가의 생생하고 거침없는 묘사를 읽다 보면 세령호의 풍경이 그림처럼 그려지다 못해 손끝에서 만져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령의 작은 몸이 질주하는 차에 들이 받히고, 현수가 용팔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정맥을 끊는 끔찍한 장면에서도 작가의 서술은 읽기가 괴로울 정도로 거침없다.


나는 작가의 묘사를 따라 세령호의 축축한 안개를 느꼈고, 승환과 함께 잠수복을 입었으며,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문장 단 몇 개만으로 독자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데려다 놓는 글의 힘이 새삼 놀라운 순간이었다.




최현수



소설은 최현수의 아들인 최서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서원은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고 자신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남긴 아버지에게 매 순간 사형 선고를 내린다. 그럼에도 현수는 여전히 서원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서원은 놀이공원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걷던 아버지 최현수를 추억한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지옥에 관한 이야기이며,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 작가의 말 中



하지만 아버지를 추억으로 바라보는 서원의 시선이, 나는 조금 불편했다. ‘최현수는 살인마다, 그러나 아버지이기도 하다.’ 라는 문장 속 ‘그러나’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왔다.


소설 속 최현수의 행동이 ‘한 순간의 실수’로 명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영제와 현수를 통해 극대화되는 이 소설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내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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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수’라는 인물을 어떻게든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마음속에 깊숙이 박힌 ‘최상사의 우물’이 살인 사건 이후 그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고 들어갔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 최현수에게 우물은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뒤섞인 심연 같은 공간이다.


절대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 안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와 닮아가게 되는 블랙홀 같은 공간. 어쩌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좋아하던 아이가 자기 아버지 손에 죽었을 때부터, 혹은 내 목숨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수몰시킨 대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서원에게도 커다란 심연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적어도 하나의 심연을 안고 살아간다. 동시에, 각자의 심연으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가끔은 심연에 무언가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삶을 이어나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심연에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다.


스스로 파멸을 향해 달려가던 현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서원의 운동화처럼.



[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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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주상
    • 정말 손끝에서 만져지는 듯한 서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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