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기는 소음투성이 7번 국도입니다 [공연]

글 입력 2019.05.0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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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사회가 완벽한 노래가 되기를 원한다. 통일된 규범 하에서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사회의 올바른 작동을 위해 마땅히 요청되는 흐름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불협화’하다는 이유로 제외되고 삭제되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음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사회는 결코 안정적인 화음만으로 이뤄진 노래가 될 수 없다.

지금 팩트는 정말 팩트인가. 모든 쟁점의 근거가 될 정도의 온당함을 취하고 있는가. 서로 다른 개별자가 대립각을 세울 때 사람들은 흔히 팩트로 승부를 보자고 한다. 그러나 팩트를 진술하는 스피커의 규모가 다르다면? 사회적 강자와 약자의 대립이라면? 목소리가 큰 사람과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는 사람이 팩트를 기반으로 공정하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부터 잘못되었다. 애초에 승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목소리가 작은 사람은 어떻게든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애써 목소리를 높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과하다고, 맹렬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상하고, 과하고, 맹렬하지 않으면 숨소리조차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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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크게 말한다. 주영, 주영의 애인 기주, 동훈, 동훈의 남편, 용선. 이 다섯 명의 피해자들이 대사를 내뱉는 목소리들은 하나도 조화롭지 못하다. 서 있는 위치도 뿔뿔이 흩어져 있다. 대화하면서도 대면하지 않는다. 그들이 대면하는 것은 오직 나의, 혹은 누군가의 불가항력적인 죽음뿐이다. 아무도 조화하지도, 조응하지도 않는 상황 가운데 각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7번 국도를 메운다. 대사를 확실하게 전달하려는 연극의 특성상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꺼져가는 불길 속에서 마지막 남은 불씨를 가지고 시위에 나선 동훈을 향한 대사를 듣고 나는 그것이 피해자의 부실한 스피커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분투에의 은유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유구한 세월 동안 홀로 시위하는 정훈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정훈은 화염병을 들지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지도, 밤낮으로 고성을 내지르지도 않고 끔찍하게 평화로운 그 곳과 어울리게 끔찍하게 평화롭게 서 있었을 것이다. 극에 나오지 않았지만 딸이 부당한 죽음을 맞이한 시점부터 오랫동안 그래왔을 것이다. 평화 시위와 선진적인 국민성의 프레임이 깨어지지 않도록, 이상해보이지 않도록, 치열하게 또 우두커니. 그러나 딸의 죽음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닥쳐올 또 다른 죽음에 이다지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항의한 정훈이 받아들여야 했던 것은 ‘이상한 사람 1’이 되어 있는 현실뿐이었다. 딸을 죽인 사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죽은 딸이 이상해져야 했다. 그렇게라도 조화로워야 했다.



통일성, 그리고 조화성


삼성 백혈병 사건과 군 의문사 사건을 다루며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이 무엇인지 밝히고 묻는 이 극에선 피해자의 목소리 내기에 가해지는 강압을 두 가지 부류로 설명한다. 하나는 피해자들은 모두 통일된 의견과 주장으로 사이좋게 담론에 동참해야 한다는 통일성에 대한 강압이고, 또 하나는 피해자들은 마땅히 회유와 설득을 통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는 조화성에 관한 강압이다. 전자는 서로 조응하지 않은 채 목소리를 크게 낼 뿐인 인물들을 통해, 후자는 권력 집단과 끈질기게 싸운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유리되는 자들에 쏟아지는 ‘이상한’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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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피해자는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가해에 대응한다. 군대 내 폭력에 시달리던 주영은 참았고, 정훈의 남편은 어떻게 싸울지 궁리했고, 용선은 합의했고, 기주는 싸웠고, 정훈은 싸우다 포기했다. 그들은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훈의 남편은 시위하며 항거하는 정훈에게 시위할 시간에 딸 지영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는 게 도움이 됐을 거라며 불만하고, 주영은 참고 견디는 게 차라리 낫더라며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토로한다. 여기에 피해자들이 힘을 합쳐 의견을 통일해 가해자를 물리치는 행복한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무결함으로 대표되던 ‘피해자다움’의 전형이 피해자를 동질적으로 묶는 그 자체로도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나는 대목이다.

극은 여기서 누구 한 명만을 피해자로 특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이 더 나은 것인지 판단할 권리가 누구에게라도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정말 맨몸으로 무모한 싸움을 할 바에야 항의를 멈추고 합의금을 받아서라도 딸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는 게 나았을까? 아니면 아예 싸움에서 물러나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대응을 강구하는 게 더 나았을까? 주영의 말처럼 참고 견디는 게 나았을까?

의미 없다. 피해자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지 논쟁하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토론으로 귀결될 뿐이다. 우선, 선택의 범위가 협소하다. 여기서 피해자에게 차별적으로 닥치는 제한적인 상황은 주영의 대사에서 언급된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만 존재하는 군대식 대화법의 비유를 통해 폭로된다. 주영이 있던 그곳에서는 두 가지 대답을 제외한 모든 대답은 소음에 불과할 뿐이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밀려오는 폭력 속에서 주영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두 가지 대답뿐이었을 것이다. 선택의 옳고 그름을 넉넉히 고려할 환경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선택의 종용 역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다운 선택, 피해자가 해야 할 선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영의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홀로 싸우는 기주를 보고 주영은 이 역시 기주가 선택할 문제라고 발언한다. 피해자의 선택이 아닌, 기주의 선택. 싸우는 자의 선택은 하나의 주체가 내리는 그것이다. 피해자들의 선택은 피해자라는 이유로 통일될 수 없다. 7번 국도에는 다섯 명의 인물과 함께 다섯 가지 피해와 다섯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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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의 환상은 사회 전반의 조화로운 상태를 완성하기 위해 강요되기도 한다. 극에서는 왜 죽은 사람 탓을 하냐는 대사가 처음과 끝에 각각 다른 이에게서 발화되는데, 처음엔 딸 지영이 ‘학교에 가지 않아서’ 피해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주영의 말에 정훈이, 끝엔 주영이 ‘좋은 학교를 나와서’ 피해를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주의 말에 정훈이 각각 발언한다. 이유가 모순된다. 피해자의 피해는 피해자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조화를 위해, 아름다움을 위해 피해자는 유리되어야 했다. 피해의 원인을 홀로 짊어진 채 표본으로 전락하여야 했다. 그렇게 피해자다움의 이미지는 탄생했고 재생산되고 있다.

무대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조각들처럼, 7번 국도는 그 어떤 부분에서도 통일될 필요도 조화로울 필요도 없는, 그러나 통일되고 조화롭길 요구받는 파편적인 개인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관객들까지 그러한 파편이 되어버린다. 아무도 서로를 규정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집단화될 수도, 동질화될 수 없다.



조용할 리도, 조용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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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긴 소음투성이다. 비명도 있을테고, 아예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의 그것도 있을 것이다. 극중 인물들이 싸울 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듯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할 것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쉬는 듯 했던 한 배우의 목소리처럼 크기는 점점 작아지나 울림은 커져가는 소리도 있을 것이다. 시끄럽다. 귀가 아프다. 소리를 낮춰 줬으면 싶다. 알아듣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극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라는 대사의 한 '사람'에 해당했던 내가 했던 생각이다. 7번 국도를 함께 달리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음색과 음정이 다른데 조용한 세상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세상이라는 것을.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적, 외적이라는 말을 수없이 쓰다 지운다. 내외를 가르는 피해자의 경계란 과연 존재하는가. 그 가상의 경계 안에 피해자를 가두고 조용하고 평온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었던가. 침묵의 환상에 길들여진 자신을 반성한다. 소음투성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음소거가 아닌, 소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쉬어가는 목소리가 있다면 스피커가 되어 힘을 보태주는 일이다. 조용할 리도 없고 조용해서도 안 되는 곳, 7번 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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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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