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개껍데기는 어디에나 있다 :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 #1 [여행]

그렇게 길은 나를 끌어올렸다
글 입력 2019.05.04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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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은 나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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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대성당



레온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황혼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순례하는 마음으로 길을 걸어보자던 버스에서의 다짐과 달리, 어스름 속에서 빛나던 레온의 아름다운 대성당을 바라보고 시가지를 거닐다가 하마터면 길바닥에 앉아 맥주를 한 잔 할 뻔했다. 이런 불량한 마음가짐에도 등산화와 커다란 배낭은 나를 순례자처럼 보이게 한 모양인지 길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친절한 레온 시민들이 많았다.


“안녕! 성당 쪽으로 가려는 거야?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야.”라며 선뜻 동행을 권하던 어느 부자(父子), “산타마리아 알베르게 찾니? 이쪽이야.” 길이 약간 어렵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까지 날 데려다 주던 아가씨까지. 헤매는 순례자들을 많이 목격해서일까? 낯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게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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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마리아 알베르게



스페인에서 ‘알베르게’는 일반적인 숙박장소를 이르는 말로 사용되지만, 순례길 위에서 이는 순례자 숙소로 명백하게 그 의미가 좁혀진다. 그도 그럴 것이 알베르게에서 하룻밤 묵기 위해선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절한 아가씨 덕분에 무사히 찾아온 산타마리아 알베르게에서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리셉션 데스크의 지긋한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심과 동시에, 내 크레덴시알에 쾅 하고 첫 도장이 찍혔다. 2018년 3월 22일, 나는 ‘순례자’라는, 아직 멋쩍기만 한 타이틀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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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



단돈 5유로에 묵을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쾌적을 기대해선 안 된다. 이는 숙박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종의 피난처인 셈이다. 공간 안에 최대한으로 들어찬 침대, 낡은 샤워실과 화장실, 그리고 얇은 부직포같은 일회용 시트가 침대 위에 우두커니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여기엔 아마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과 예쁜 풍경 덕분인지 레온에 도착해서부터 계속 묘한 따뜻함이 마음에 퍼진 상태였고, 숙소로 하나 둘 휴식을 취하러 오는 순례자들의 표정이 고단한 와중에 무척 평안해 보였으며, 그러다 보니 걷지도 않은 순례길에 금세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지난 주 걸려온 봄감기가 채 떨어지지 않아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밭은기침이 시종일관 튀어나왔지만, 부디 내가 다른 순례자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튿날 오전 7시. 어제 보았던 할머니의 손뼉소리에 눈을 떴다. 공기가 차서 간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몸은 가볍게 일으킬 수 있었다. 침낭을 정리하고 세수를 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다. 계속 길을 걸어왔던 다른 순례자들에 비해 나는 이 공간에 이질적인 존재같다.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온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 밀려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침은 더 자주 튀어나오고 생리녀석은 예정일보다 한참 빠르게 또 찾아왔다. 밖의 온도는 섭씨 2도지만 걸친 건 경량패딩뿐이다.

 

그래도 뭐, 돌아가는 건 내 선택지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기를 시작해야 한다니,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조금 순례자 정체성을 갖게 된 걸까. 어젯밤 식당에서 쉬다 잠깐 얘기를 나눴던 독일인 친구 야나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길이 힘들거나 길 찾기가 어렵지 않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일단 길에 올라서 봐. 그럼 그냥 쉬울 거야.”라고 말했다. 행색이 어떻고, 경험이 얼마큼 있으며, 준비를 많이 해왔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목적지가 있는 한 이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같았다. 주저하는 마음을 길들였냐 길들이지 않았냐의 차이가 날 뿐이라 생각했다. 머뭇거리던 나를, 길은 그렇게 끌어올렸다.


마지막으로 길에 오르기 전, 판초를 샀다. 여태 마주쳐왔던 스페인은 맑은 날씨만 보여주었지만, 길에서 비를 만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판초를 산 건 순전히 비가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늘에 우두커니 서서 비가 지나가길 바라고 싶진 않았다. 원한다면 비와 함께 걷고 싶었다.


이제 정말로 길에 오를 때가 되었다. 저기 앞에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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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 축복의 길


 

순례자들끼리는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게 “부엔 까미노”다. Buen은 ‘좋은’, Camino는 ‘길’을 의미한다. 의역하자면 ‘축복의 길이 되기를!’ 정도 되겠다. 따뜻한 레온 시민들 덕분에 내면의 경계가 조금 풀어지긴 했지만, 역시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레온 광장 쪽에서 행인들 틈으로 샛노란 화살표가 눈에 띄어 사진을 찍었는데, 그 뒤로 형광색 배낭을 맨 한 아저씨가 지나갔다.


철제 캐리어에 등산화를 올려둔 뒤 그걸 허리에 엮어 걸어가고 있는 아저씨. 단번에 그가 순례자임을 알 수 있었다. “부엔 까미노”가 입속에 맴돌았지만,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해서 차마 아저씨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지 못했다. 같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는 처지여서, 그를 지나치지 못하게 되어버린 나는 의도치 않게 아저씨의 뒤를 밟는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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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은 상당히 큰 도시였는지 교외로 향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전거 순례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자전거 순례객이 레온 외곽에서 나를 지나쳐갔다. 짧은 순간에도 그들은 인사를 잊지 않았다. 망설임이 없는 “부엔 까미노.” 찰나의 머뭇거림은 인사를 받아주기엔 너무 먼 거리로 그들을 데려다놓았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게 원망스런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순례자들을 많이 만날텐데 인사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같은 순례자로서 격려조차 하지 못한다면 너무 서글플 것 같았다. 자전거 순례객에게 인사를 하지 못한 벌로, 다음에 순례자를 마주치면 무조건 먼저 “부엔 까미노”를 외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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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건물이 없고 자동차만 지나다니는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아까 상점을 구경하다 놓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가 잠시 멈춰서 무언가를 하는 틈에 내가 아저씨를 지나치기도 하고, 음악을 고르느라 걸음이 느려지면 아저씨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기도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암묵적인 동행자가 된 느낌이었고, 마주칠 때마다 “올라!(안녕)”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아저씨를 완전히 놓친 것은 길바닥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며 쉴 때였다. 전 날 먹고 남은 빵과 물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마음껏 쉬었다. 하루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구름은 느리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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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순례길이 자동차 소리가 가득한 도로 옆이라니, 조금 아쉽기도 하다. 들판이나 오솔길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로 위에도 신선한 풍경은 있었다. 걷다 보니 교통 체증도 없는데, 차들이 경적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빵빵! 빠라빠라빵!”하면서 정말 요란하게 누군가 경적을 울리길래 쳐다보았더니, 웬 걸! 트럭 안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신나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차에 탄 사람들이 순례자인 나를 보고 경적을 울리며 아는 체를 해주던 것이다. 또 어떤 차는 아예 멈춰 서더니, 조수석에 있던 이가 나에게 추로스를 먹으라며 건네곤 쌩 하고 사라졌다. 몇시간 전만 해도 주저하던 나였는데 이런 관심을 받으니 조금 벙찌기도 했지만, 이내 웃음이 툭툭 터져나왔다. 순례길 위의 모든 만물들은 사랑이 넘치는구나.

 

도로가 나뉘기 시작하고 드문드문 인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가 사이로 보이는 건 아까 놓쳤던 아저씨. 괜한 반가움에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저씨가 되돌아오고 있던 것이다. 그가 길을 잃은게 아닐까 싶어, 멈춰 서서 그 방향이 아니라고 손짓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푸근하게 웃으며 근처에 있던 어떤 알베르게 표지판을 가리키곤, 두 손을 모아 잠자는 시늉을 했다.


아직 오후 1시, 많은 순례자들이 한창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시간일테지만 그는 오늘 조금 일찍 쉬기로 했나 보다. 순간 그가 취하는 휴식이 한없이 편안했으면 좋겠고, 앞으로 그가 걸어갈 길 또한 너무 험난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 처음으로,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부엔 까미노!”를 크게 외쳤다. 건너편에 있는 그에게 들릴 수 있게 양 손을 입에 갖다대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건 이보다 더 큰 “부엔 까미노!”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길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길이 정말 축복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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