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주 한 병 [사람]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나의 감정 에세이
글 입력 2019.05.0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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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걸어 쥐고 걷는다. 길들여지지 않은 새 운동화 밑창이 콘크리트 바닥을 빈틈없이 내딛는다. 걸을 때마다 그 자리에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을 것 같은데 바닥은 멀쩡하다. 하늘을 향해 숨을 최대한 길게 내뱉었다. 내가 풍선이 되어버린 것 같다. 가볍게 두둥실 떠올라야 할 헬륨 풍선에 무겁고 텁텁한 이산화탄소가 섞였다. 그 양이 점점 많아지더니 이제는 풍선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바닥을 향해서 천천히, 다시 올라갈 기미도 없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숨을 뱉어보았다. 어지럽다. 나도 알 수 없는 이 어지러운 형체가 목구멍을 툭툭 건드리고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쥐고 있는 비닐봉지 안에는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소주 한 병이 들어있다. 내 손으로 직접 고른 것이다. 맥주 한 캔으로 지워버릴 수 없는 감정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나 보다.

 

 


첫 번째 잔. 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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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꿈을 꾼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꿈. 시간이 흐를 때마다 그 꿈은 풍선처럼 부푼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몸을 일으킨다. 간절한 손아귀로 풍선을 움켜쥔다. 주변 사람들은 내 풍선을 보고 한 마디씩 한다. 끌어안고 있는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떠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사람들은 풍선을 압박해 짓눌러 터트릴 것 같다.


“아직 간절하지는 않구나.”

 

나의 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꿈꾸면 실현이 되는 것일까. 나는 정말 간절한데. 하지만 더 간절해야 하나. 꿈이 없어 슬픈 것보다, 간절한 꿈이 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쪽에 더 연민한다. 아무런 걸림돌 없이 앞길이 훤하게 뻗어있고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가득 차오를 때가 있다. 그 마음을 담고 달리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빗방울이 거세게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뚝 멈춰 선다. 정말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사회가 나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텐데. 두려움을 느끼고 모든 의욕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무시무시한 현실에 극에 치닫는 공포감을 느끼고 무릎을 꿇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현실과 마주친 이후로 나는 한동안 숨어 지냈다. 지금의 나에게 사람들은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서 나는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다. 언제나 중간, 중립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나는 현실에 더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현실’과 가까워졌다니, 씁쓸한 일이다.


나는 내 미래가 걱정이고, 두렵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가도 진짜 내게 주어질 기회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목구멍이 다시 뜨거워진다. 당연하게 삼킨다. 이 시기는 내가 대확행을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것일까. 나만이 겪는 일은 아닐까. 나는 누구에게 질문을 하는 것일까. 아무나 나에게 충분히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해주었으면 하다.


 

 

세 번째 잔. 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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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날을 떠올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글을 읽으며 글을 쓰며 아물게 했다. 글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말은 귀로 담지만 글은 가슴으로 담는다. 눈으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읽어 내려간다. 눈은 마음으로 가는 입구다. 그렇게 들어온 글은 마음으로 간다. 받은 만큼 베풀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씩 써왔다.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된 것이 지금 나를 많은 고민에 빠트린다. 내가 정말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쓰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모두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꺼림칙하다. 전처럼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책 읽는 게 좋다. 언제나 같은 생각, 같은 고민을 나열하는 요즘 사람들과의 대화에 지쳤다. 사람은 그 시기, 그 나이에 맞게 모두 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누가 정해놓은 것 같다. 이 사회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와는 또 다른 신선하고 흥미로운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그 매력에 빠져 지금의 내가 시작된 것이다.

 

그저 읽는 것이 좋다. 쓰는 것은 괴롭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쓰지 않으면 안 되어서 글을 쓴다. 아무래도 나는 죽기 전까지 쓰게 되겠지. 앞으로의 내 인생에 또 많은 하향곡선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믿을 것이 내 마음 하나밖에 없다. 더럽게 무거운 몸뚱이를 끈으로 꽁꽁 싸매고 질질 끌고 나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잔.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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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찰랑대는 마지막 소주를 부었다. 탈탈 털어낸 마지막 잔은 술잔을 완전히 채우지 못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워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저기 보이는 시야가 멀어진다. 풍선이 저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손에 느껴지는 풍선의 감촉은 여전하다. 결국 나는 이 감정에 대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전처럼 감정을 모두 쏟아내지 못한다. 굳이 쏟아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감정이 최근 갑작스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치 그렇게 될 거라는 듯이 꽤 전부터 작은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는 외면했고, 계속 쌓여 점점 더 위태롭게 불안정해진 것뿐이다. 더 이상 나는 타인을 위로할 수 없다.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지 못한다. 나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아직 정신이 남아있기에 이렇게 글을 쓴다. 나는 완전히 취하지 않았다. 소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탈탈 털어 마셔도, 360ml의 용량을 완전히 마시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병 안쪽에 묻어있는 소주까지 마실 수는 없는 일이다. 마시는 중에 흘려버린 몇 방울, 소주잔에 남아있는 한 방울, 소주병에 묻어있는 한 방울. 이렇듯 100%의 소주를 마시지 못한다. 언제나 99%, 아니면 99.5%밖에 채울 수 없다.


이처럼 나의 인생 또한 100%에 항상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에세이 또한 완결을 낼 수 없다. 소주 한 병에 이끌려 두서없이 쏟아진 고민과 감정들은 앞으로의 삶에서 복습될 수도 있겠다. 결코 희망적이지는 않더라도 힘이 덜 들지는 않을까. 내 마음이 소주 한 병의 모습과 이렇게나 닮았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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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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