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세상을 업고 강을 건너야 하는 인간에 대하여 [도서]

글 입력 2019.05.09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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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꾼 책의 구절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바꾼 한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 구절을 읽은 찰나에 곧바로 삶이 바뀌지는 않았더라도, 문장을 가슴에 품은 채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 바람에 어느새 그 문장이 내 안에 녹아버린, 그런 경험을 많이들 해보았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구절들이 있었다. '좋았으면 추억이고 나빴으면 경험이다'라는 한 캘리그라피 작품의 문구가 그랬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명언이 그랬다. 하지만 정말로 '나를 바꿨다'고 말할 수 있는 문장은 따로 있다. 하나의 문장은 아니고,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책에 나오는 네 페이지 정도 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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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페이지를 전부 옮기기는 어려워 요약을 해보려 한다. 예수와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다. 크리스토프는 아주 힘이 센 가나안 사람으로, 강가에 살면서 강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여행객들을 업어다가 데려다주는 '인간 뱃사공'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자고 있던 크리스토프 귀에 희미한 부름이 들려왔다. '크리스토프!' 깜짝 놀라 밖에 나가보니, 한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크리스토프는 그를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살도 잔잔하고, 아이도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물은 거세지고 아이의 무게는 더해져, 하마터면 그는 강물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뻔했다. 겨우 균형을 잡고 강 저편에 다다라 아이를 내려놓으며, 크리스토프가 불평했다. "너처럼 무거운 아이는 처음 본다.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 순간, 아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예수가 빛을 내며 선 채 말했다.



"크리스토프!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꿈은 일상이 되고 이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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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는, 내게는 삶에 대한 가장 완벽한 비유로 다가온다. 삶은 결국, 출생 이전의 세계와 죽음 이후의 세계 사이의 강물을 헤쳐나가는 일이다. 처음 강을 건너기 시작할 때, 말하자면 어린 나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자신만만하다. 초등학생들의 꿈에 대통령이 흔히 등장하는 건 그 자신감 때문일테다. 하지만 잔잔해보이던 강물이 숨겨왔던 폭풍우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인생의 잔혹함에 속절 없이 당하는 동안 그들의 자신감은 스러지며 두려움이 자라난다.

처음에는 인생의 이유였고 열정을 쏟을 대상이었던 학문, 예술, 문학 등은 생계의 수단이 되면서부터 오히려 스스로를 짓누르는 짐으로 다가온다. 강을 건너게 해줄 크리스토프인 줄 알았던 무엇이, 사실은 내가 견뎌내야 할 막중한 무게를 지닌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꿈은 일상이 되고 이상은 현실이 된다. 세속적 삶의 굴레는 열정과 사랑을 무디게 만든다. 하루하루 내딛는 발걸음의 버거움에 지쳐, 사람들은 '왜 이 강을 건너야 하는지'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강을 건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가 지고 있는 이 무거운 짐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대답 없는 질문을 되풀이한다. 성경 속 이야기에 따르면 크리스토프는 강을 다 건넌 뒤에야 자신이 업고 있었던 사람이 실은 예수이자 한 세계 전체였음을 깨달았다. 그 비유와 인생이 같다면, 현세 속 인간 역시 죽을 때까지도 인생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는 없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우리는 크리스토프보다는 좀 더 똑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달할 수 없는 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 분명 내 존재 의의를 만들어 나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세계를 창조하며 동시에 짊어진다. 세계에는 7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 같은 소우주를 가진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그렇기에 70억이라는 광대한 인구 숫자는, 나의 소중함이나 존귀함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나는 오로지 살아 있기에, 그 이유 때문에만 존귀하다. 강을 건너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유도, 매일매일 주저 앉고 싶어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내가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일


나는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에 가까웠다. 하기야, 자신에게 '불행한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이 더 많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행은 지속적이나 행복은 찰나적이다. 그래서인지, 불행에 대한 사유는 사람마다 정말 가지각색이며, 그 사연도 경중은 다를지언정 전부 기구하다. 지금은 그나마 '나만 이런 고민과 고통을 짊어진 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여유는 갖게 되었지만, 한 때는 나를 둘러싼 상황적 여건과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 자신 모두를 죽도록 미워했던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이런 상상도 했었다. 책을 읽다 평소처럼 스르륵 잠이 들어,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자다가, 아주 긴 시간 동안 - 혹은 영원이라는 시간 동안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떨까? '자살'과 같은 적극적 행위를 고려에 넣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태어나서 얻은 기쁨보다 슬픔이 더 큰 것 같다는 아픈 생각은 자주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마다, 고등학교 때 책에서 만났던 예수와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는 나를 현실로 붙들어매는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인생은 거센 강물을 건너는 일 같은 거라고, 이 폭풍우에 완벽히 적응하는 날이 오기는 힘들겠지만 맷집이 세질수록 걸음도 더 가벼워질 거라고, 언젠가는 내가 업고 있는 무거운 세상이 도리어 내게 힘이 되어주는 날도 올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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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내가 위와 같은, 어찌보면 끔찍한 상상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인연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셨던 상담 선생님, 인생이 버거워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내 문을 끊임 없이 두드려주었던 나의 베프, 긴 방황 끝에 만난 것이 야속할 정도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남자친구,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는 삶의 저편으로의 여정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크리스토프였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예수와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화자, 윤 교수는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함께 아이를 강 저편으로 실어 나르게. 뿐인가.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이 글을 읽어주는 당신이 있어, 글을 쓰는 짐을 짊어지는 동안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 수 없어도, 고맙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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