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시 쓸 때까지] 04. 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글 입력 2019.05.0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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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다시 쓸 때까지]

04. 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글. 김해서



얼마 전, 아빠는 고양이용 통조림을 여럿 구매했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을 챙기기 위함이다. 오랫동안 유기동물을 케어하고 있는 지인에게 여러 가지 팁도 얻은 모양이다. 경계심 많은 애들에겐 먹이를 어떤 식으로 줘야 하는지, 어떤 사료가 가성비 괜찮은지. 전해 들은 얘기를 요리조리 내게 설명하며 소셜커머스를 뒤지는 모습이란. 가끔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하시는데, 이쯤 되면 의심할 여지 없이 아빠도 우리 '랜선집사 공동체'에 합류한 셈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특히, 내가 애정하는 것을 그들도 애정하게 되었을 때 말이다. 고양이, 능소화, 구제 옷, 바다, 시, 저녁, 매운 음식. 열심히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니 '맛있어! 진짜 맛있어!'라는 응답이 돌아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쾌감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끼고, 내가 좋아하는 능소화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반갑게 여기다니.

취향을 공유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곁에 있는 이가 ‘진짜로’ 내 삶에 들어온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양이를 쓰다듬을 때, 누군가도 같은 마음으로 고양이를 토닥인다. 누군가가 골목에서 능소화를 만났을 때, 마치 나와 능소화를 동시에 만난 것 같은 기분을 그가 느낀다. 행복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굳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내 행복이 외롭지 않을 수 있어 기쁘다고.

슬픔이 폭풍 같았던 이십 대 초반에는 슬픈 상황과 별개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당시에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말을 하나 꼽자면, 이거다 . '너 꼭 겨울나무 같아.'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었던 나를 보며 누구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우스갯소리로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평생 청승 떨면서 살아봐'라던 구남친의 말보다 더 충격이던 모양인지 지금도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슬픔에 젖다 못해 슬픔 속에서 흘러 다니듯 휘청거리며 걷던 나는 다른 감정에 굉장히 둔감한 편이었다. 기쁜 날에도 기쁜 게 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돌이켜 보면, '오늘도 기필코(?) 슬퍼지겠지'라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봐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고, 내가 쓴 시 역시 엄숙하고 어두운 느낌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얼마나 웃지 않았던지 안면 근육이 굳어 오른쪽 입꼬리가 왼쪽만큼 올라가지 않아 소위 말해 늘 '썩소'였다. 웃어도, 스스로가 어색하고 찌그러진 존재 같았다.

지금은 그 비죽이는 표정을 상당히 고쳤는데, 의식적으로 오른쪽 입꼬리를 더 올리려 노력했던 게 꽤 효과가 있었다. 미소를 다듬으면서 '잘' 웃는다는 것이 뭔지 고민했다. 생각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이를테면 고양이가, 허우적거리는 내 목덜미를 낚아채 뭍으로 건져 올려 주었다. 슬퍼도, 웃어도 된다. 아무리 슬퍼도, 너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슬퍼도, 좋아하는 것을 여전히 좋아해도 된다.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마음을 나눠도 되고, 좋다, 좋다, 좋다, 말하고 설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

고양이는 개와 달리 사람에게 정이 없어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던 아빠가 요즘은 녀석들의 먹이를 살뜰하게 챙긴다. 장미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꽃에 관심이 없던 애인이 능소화는 꼭 걸음을 멈춰 구경한다. 너무 가난해서, 자식들에게 싸구려 구제 옷을 입혀야 하는 게 서러워 엉엉 울었다던 엄마가 이젠 종종 내 빈티지 옷을 탐낸다. 나로 인해 그들 삶에 사랑 하나 더 생길 수 있다면 나는 계속 좋다, 좋다, 좋다, 자꾸 말하고 싶다. 그들 삶에 내가 퍼즐처럼 끼워 맞춰져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잘 맞는 퍼즐 조각이라니. 근사한 일. 어느 날 돌연 내가 죽더라도, 조각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다.

더 이상 나는 엉거주춤 웃지 않는다. 슬플 땐 슬프고 행복할 땐 행복하다. 편하다. 잘 맞는 옷을 걸친 것처럼. 나는 내 운명이 어떤 그림인지조차 모른 채 끼워져 있는 작은 퍼즐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슬플 때 결국 온 생을 들썩이며 슬퍼해야겠지만, 이젠 안다. 이따금 이 삶과 맞닿은 다른 조각들에 기대어 웃어볼 수도 있음을. 그 행복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영혼이 버석버석 말라 부서질 것만 같아도 삶은 사라지지 않고 되려 질겨지는 법이니. 사랑 앞에서 잘 웃어야 하는 이유를 알겠다. 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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