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참 소질없는 페미니스트들 - 환희, 물집, 화상

연극 <환희, 물집, 화상>
글 입력 2019.05.0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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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물집화상_공연사진(c극단8월_김희지)96.jpg
 


"참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이야. 아주 근사해!"


이 위트 있는 한 마디 대사와 함께 나는 박수치며 공연장을 떠났다. 이 대사가 쓰여진 티켓을 보고 내가 아는 한 선배 역시 큰 웃음을 터트렸었다.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 우리는 너무도 이 말에 공감할 수 있기에 이 단어를 보는 순간 큭큭거릴 수밖에 없다.


연극은 과장된 코미디면서도 또 터무니없진 않아서, 한참 웃다가도 가끔 배우들과 눈이 마주치면 그 웃음이 약간 자조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공간 속의 모두가 함께 경험했던 것이고, 아무도 서로를 평가하거나 잘못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서린이 던과 점점 가까워지며 그웬에게 역할 바꾸기를 하자고 부추기는 장면에서 누군가 모두가 들을 만큼의 큰 한숨을 내뱉었고, 그걸 들은 모두가 일제히 웃어버렸다는 것 또한 이 연극의 특별함이었다.


*

 

환희, 물집, 화상, 무작위로 떠오른 낱말들 같으면서도 공연엔 세 가지 요소가 계속해서 등장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느끼는 일상의 감정들, 사건들이 함께 뒤섞이며 연극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몰입시킨다. 그만큼 너무도 현실을 보여주는 공연이라 자칫 신파극이 될 뻔 했으나, 그렇게 되어 갈 쯤 에이버리의 시원한 욕설이 우리의 마음을 뻥 뚫어주었다.


멍이 든 눈으로 등장한 첫 장면과 달리 가장 빠르게 깨어나는 인물, 바로 현 세대의 여성들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했기에 아마도 가장 공감이 가지 않았나 싶다. 캐서린과 그웬 역시 공감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그 때 내가 떠나지 않았더라면"을 보여주는 두 인물은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다가도 후회하고, 뒤집었다가 결국은 자신이 선택한 길로 되돌아간다.


 

환희물집화상_공연사진(c극단8월_김희지)57.jpg
 


여기에서 연극은 끝났지만, 나는 그웬이 그 이후에도 이전과 같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페미니즘을 다시 배웠고, 밖으로 나가 사회를 경험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시도해봤으니 말이다. 또한 그녀가 지겹도록 바라보던 아들이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으니, 아마 다음 날의 그웬은 어제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던은 바뀌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서 던이 했던 것이라고는 현실에 안주하며 게으르게 살다가, 옛 사랑을 만나 불을 지피고, 결국 바뀐 상황을 못이겨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인데 과연 많이 바뀌었을지 잘 모르겠다. 그웬에게 만족하며 살자는 생각은 들었겠지만 말이다.


이 연극의 엔딩에는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캐서린, 에이버리, 앨리스가 함께 밝은 미래를 희망하며 잔을 부딪히는 장면, 이전의 프리뷰에서 나는 이 연극이 어느 페미니즘 노선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일지 궁금했는데, 그 끝에서 답을 찾은 것 같다.


러닝타임 내내 베티 프리단과 필리스 슐레플리를 함께 논하고 '이것도 장점이 있고 저것도 단점이 있어'라는 식의 대사가 여러 번 나왔지만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는 결국 베티 프리단에게 비춰진 듯 하다. 나는 나쁘지 않은, 예상했던 대로의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슐레플리의 손을 들어주기엔 110분의 시간 안에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대부분이 20-30대 여성이었던 관객들에게 아내와 엄마가 되자는 메시지를 보내기는 부적절한 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환희물집화상_공연사진(c극단8월_김희지)12.jpg


내가 이 연극에 대해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유연함이라 말하고 싶다. 약간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부분은 오히려 의식적인 연기로 표현하여 의도를 잘 보여주었고, 딱딱할 수 있는 소재를 코미디라는 장르와 자연스럽게 섞어 거부감을 줄였다. 덕분에 불편함은 가볍게 넘기고 페미니즘과 극 자체의 서사 간에 조화를 느꼈다.


특히 그 시간, 그 장소 안의 모두가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던 공연이었다. 이런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소중했던 공연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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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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