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방가르드여, 영원하라! [시각예술]

《대안적 언어-야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展
글 입력 2019.05.1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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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지배적인 기성 예술의 권위를 전복하기 위해 매우 사회적인 미술 운동으로 등장한 아방가르드는, 그마저도 고급예술로 분류되면서 예술지상주의로 전락하였고 그것은 키치라는 이름의 대중예술을 탄압하는 권력이 되었다. 사전에 검색하면 번역어로 나오는 ‘전위파’·‘선구자’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아방가르드는 탈정치화를 마치고 나와 끝없는 자기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꼰대 미술’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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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ger Jorn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스거 욘의 진보적인 실험정신과 사회 구조에 대한 정치적 시각은 전위가 더 이상 전위가 아닌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미술사에서 삭제되었고, 그는 그저 덴마크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의 아방가르드는 탈정치화 이후의 아방가르드가 아니었다. 정치적·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특정 누군가를 위한 방어나 배제 없이 보통의 사람들과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방법을 탐색했던, 진정한 전위이자 선구로서의 아방가르드였다. 예술을 사랑한 그는 기꺼이 삶으로써 예술을 안았고, 삶과 예술을 분리하는 예술지상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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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대안적 언어-야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를 통해 그동안 그의 회화와 묘사법에만 경도되어 있던 기존의 미술사적 시각에서 벗어나 조각, 드로잉, 사진, 출판, 글쓰기, 도자공예, 직조 등 그가 남긴 다양한 형태의 미술을 조망하고 개인의 기록과 역사를 좇아 보다 넓은 범주에서 그의 대안적 시각을 탐구하고자 한다.

*

전시는 세 개의 주제로 나뉜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주제인 「실험정신 - 새로운 물질과 형태」에서는 그의 미적 실험의 재료를 제공한 미술사적 배경을 해설한다. 두 번째 주제  「정치적 헌신 - 구조에 대한 도전」에서는 ‘코브라(CoBrA)’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등의 그룹 활동을 통해 기존 사회 구조에 대항한 욘의 도전을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하여 소개한다. 세 번째 주제  「대안적 세계관 - 북유럽 전통」에서는 스칸디나비아 예술을 연구한 이력에 기초하여 북유럽 문화를 분석한 욘의 새로운 세계관을 설명한다.

같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와 앵겔스도 차용했다는 우연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궤적을 모방한 전시의 삼단 전개는 정(正)-반(反)-합(合)의 구조로 이루어지는 헤겔의 변증법과 닮아있다. 그 자체로 있던 것에서(正), 그에 모순을 느끼며 대립하고 분열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가(反), 모순을 통합하여 대립을 해결한다(合). 명쾌하게 아스거 욘이라는 예술가와 그의 전시를 설명하는 이 흥미로운 구조를 기반으로 하여 전시를 재고해보기로 했다.



1. 과거와 지금을 흡수하다. 정(正)


젊은 작가들의 혁신이 가지각색의 방향으로 태동하던 1940년대의 덴마크에서 욘은 피카소와 미로를 재료 삼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해체된 색과 면을 중첩시키거나 플라스틱과 비닐 포장지, 유리 등의 재료를 캔버스에 펼쳐놓은 것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미술을, 사물의 재현과 모방을 거부하고 사물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초현실적 통찰력은 미로의 그것을 연상하게 한다. 욘에게 예술은 공동체의 경험이었다. 같이 하는 것이었다. 동시대의 미술 경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자기화하며 수많은 작가들과 같이 예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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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이 같이 한 것은 동시대 작가뿐이 아니었다. 그는 미래로의 전위를 위해 과거를 회고했다. 그것도 아주 먼 옛날을. 욘의 회화는 종종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기하학적인 문양과 선과 점으로 해체된 형상은 원시적인 감각을 드러내며, 선명한 원색의 무질서적 배열과 정돈되지 않아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질감 역시 감각적이고 원초적이다. 그가 표현한 동물은 동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과도 닮아있을 정도로 문화적 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재료의 평등을 강조한 욘은 온갖 도구를 이용하여 미술사를 흡수한다. 이를테면 돌을 거칠게 떼어내어 만든 듯한 조형을 통해 돌을 섬기는 고대의 주술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든가, 태피스트리에 자수를 놓는 것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도상이나 금색으로 배경을 칠한 회화처럼 이따금 느껴지는 종교적 신비감은 절대자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만들어진 직후의 태곳적 순간으로 회귀하려 했던 그의 자취를 드러낸다.



2. 돌아가라, 수정하라, 기억하라. 반(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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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미완의 형태 파괴)>


과거와 현재를 흡수한 욘은 그에 그치지 않고 반(反)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한다. 코브라(CoBrA)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등의 그룹 활동을 통해 진보적 예술가들과 함께 거침없이 반항했던 그는 낡은 회화에 자신의 개성적인 붓질을 더하여 회화 속 엄격함을 통쾌하게 타파했다. 여인을 새(鳥)로 만들고, 풍경의 고요함을 찢고, 예기치 못한 구성을 통해 분열을 표현하며 찢어진 틈새로 자신을 드러냈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 언어의 세계로 통하는 그의 미술은 어린 아이도, 이방인도, 문맹도 읽을 수 있다. 그가 흡수했던 동시대의 진보적 미술 경향마저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일 만큼 완전한 발가벗음의 세계로 돌아간 욘은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갔고, 수정하고, 기억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짐승’이라는 개념은 욘의 이러한 세계관을 십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형상의 회화를 그렸다. 그는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인간 중심적인 기준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권력 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구분선을 지워 둘을 섞어버렸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짐승을 보았으며, 그것은 보편적인 세계에서의 문법이 그러하듯 부정적으로 표현되지도 않는다. 태초의 순간에도 그랬을까. 인간은 짐승이었고 짐승은 인간이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평등의 미래를 꿈꾸며 과거에서 그 답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3. 야만을 사랑한 선구자, 합(合)


욘은 스칸디나비아의 예술을 연구하며 남유럽 문화와 구분되는 북유럽 문화의 속성을 정의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야만’이었다. 그러나 ‘인간짐승’이 그랬듯이, 그가 정의한 ‘야만’ 역시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그의 미술에는 야만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른다. 야만의 기준을 제멋대로 규정한 누군가를 반(反)의 단계에서 비판했다면, 마침내 합(合)의 단계에 도달한 그는 직접 야만을 자신의 대안적 언어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을 캔버스에 펼쳐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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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의 혀와 익힌 혀’라는 이미지 작품이 재미있다. 욘은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을 한 흑백의 얼굴들이 형광의 혀를 내밀며 ‘메롱’을 하는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이미지를 바라보는 자신의 익살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얼마나 ‘야만적’인가. 그가 생각한 전위와 선구의 끝은 미술관에 고고하게 놓인 이미지들에 ‘메롱’ 할 수 있는, 너무나 쉽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그 정도의 ‘야만’이었다.

*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합(合)은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그 역시 정(正)이 되어 또 다른 모순을 내포하게 되고 또 다른 반(反)과 만나 대립하여 합(合)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변증법과 닮은 아스거 욘의 미술이 무엇과 대립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는 의미 있는 물음은 될 수 있어도 지속 가능한 질문은 아닐 수도 있겠다. 어차피 반박될 것이고, 발판이 되어 그 위에 수많은 질문들이 쌓이고 또 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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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스거 욘의 아방가르드만은 타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전시실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삼면축구’를 보고 든 생각이다. 두 팀이 아닌 세 팀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묘사한 설치작품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 않고 모두가 즐겁게 유희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욘이 꿈꾸는 세상에는 이김과 짐이 없다. 마찬가지로 욘의 예술에는 고급과 저급이 없다. 인간이 짐승이며, 짐승이 인간인 그의 세계관에서는 아방가르드가 곧 키치고 키치가 아방가르드다. 모두가 경험하는 원초적 순간을 버려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그의 미술만큼은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향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의 작품을 번외로 모아둔 남루한 창고 같은 곳에 적혀 있던 마지막 주제의 제목에서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방가르드여, 영원하라(Long Live, the avant-garde).”





참고 국립현대미술관 《대안적 언어-야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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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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