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말 "시간"은 무엇일까 - 뉴필로소퍼 6호

뉴필로소퍼 6호_ "시간"
글 입력 2019.05.1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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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


일단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이 책을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빨랐다.


훨씬. 아주 훨씬.



뉴필로소퍼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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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정말 "시간"은 무엇일까






!!시간!!


얼마 만이었을까, 아니 도서로는 처음이었을까. 표지의 첫 문장을 보자마자 이걸 읽어야겠다고 마음 다짐한 것이. 항상 새로운 도서 소식을 접하고 나면 이 도서를 읽을지 말지 고민하기 위해 읽던 도서 소개 글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읽기도 전에 만난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짧은 질문이 도서 신청부터 이 글을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냥 너무 단순하게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에 반해버렸던 것이다.


요즘 나의 관심은 ‘사람을 가두고 있는 어떤 것’들이다. 흔히 언급되는 사회라는 것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닌, “존재라서 피할 수 없이 갇혀있는 어떤 것"들에 대해 말이다. 그러니까 너무 익숙해서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못하는 것들. 그중에는 시간도 있었다.


시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랬었다. 어떻게든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 혹은 정말 존재하는 어떤 것, 하여튼 쉽게만 정의할 수 없는 그런 것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선 벗어날 수 없다. 아무도 시간을 제멋대로 멈출 수 없으며, 동시에 아무도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시간 아래서 저마다의 탄생과 죽음 사이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시간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방식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불가능하니까)도 종종 하고 있었다(아니, 상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으려나). 잘 모르겠지만 시간을 이미 정해진 단위가 아닌, ‘나’라는 범위에서 만들어지는 단위에서 재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만이 다룰 수 있는 시간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스스로도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해보던 일련의 작업들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 무엇에? 시간에. 글 3개와 영상 편집을 이번 주 안에 마감해야 하는 미션을  스스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시간을 더 끌어 오겠다는 오기 속에서 지금을 살고 있다. 이것은 평소 느리고 게으른 나의 탓인가, 아니면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 탓인가, 시간이 겨우 24시간뿐인 탓인가. 하여튼 누구의 탓이든 그런 고민을 할 동안에 시간은 또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첫인상은, “그래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뭔가 익숙한 질문” 이었다. 하지만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무슨 대답을 기대하며 던져진 건지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걸까, 아님 시간 관리 잘하고 물어보는 걸까, 나만의 시간이 혹은 여유가 있냐고 물어보는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묘한 질문이었다.


“당신의 시간”이라는 말은 곧 시간 중에 “나의 시간”으로서 정의 가능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시간을 단순히 누구나 같은 조건 아래에 있는 거라고만 생각하기에는 ‘나’라는 세계나 방식에서 정의되는 시간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아닐까. 반면 주관적인 시간, 누군가의 삶의 방식과 경험으로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반대로 객관적인 시간이란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질문은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지며 어떤 지점을 파악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 결국 시간에 대해서는 아직 그 무엇도 아직 온전히 완성된 것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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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정해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도

언제든지 질문할 수 있다.

정말 ‘시간’은 무엇일까.


"일상을 철학하다”를 말하는 뉴필로소퍼가 이번에는 우리에게 일상 속에 너무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이 거대한 삶과 일상을 감싸 안고 있는 시간이란 것에 대해 철학하자고 한다. 그리고 이번 뉴필로소퍼는 나에게 평소엔 닿지 못했던 깊이, 아니 내 일상에 이런 깊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곳까지 이르는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깊은 내용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나는 적어도 뉴필로소퍼를 두고서는 깊다는 의미를 심오하고 어려운 얘기만을 뜻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점이 보지 못한 것으로서의 깊은 세계라면 흥미로운 미지의 세계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나의 첫 뉴필로소퍼"



시간은 흐른다.

아니 그런데

정말 ‘시간’이 흐르는 것일까?

과연 ‘시간’이란 건 ‘흐르는’ 것일까?



처음으로 뉴필로소퍼와 함께한 시간을 되돌아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내가 정말 가만히 읽으면서 내용을 주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도 생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주제, 그것도 시간에 대해 말하는 다양한 글과 정보를 한 번에 접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시간을 ‘우리가 그저 그렇게만 생각해온 시간’뿐만이 아니라며 한 발짝 더 나아간 범위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라는 주제는 너무 익숙한데 뉴필로소퍼에 담긴 내용은 뭔가 달랐다. 잠시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언급되던 표면에서 벗어나서 다른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너무 새로웠다. 지금까지 의심 없이 익숙하기만 했어서 더 새로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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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내용은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나에게 익숙한 방식과 낯선 방식의 접근이 한 권의 책 속에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뉴필로소퍼를 읽는 데 어떤 지장이 되지는 않았다. 다양한 글들이 만들어 놓은 깊이의 수면 위에서 나는 내가 들어가고 싶은 만큼 들어가거나 나오면서 또 그 위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는 것이 더 좋았고 매력적이었다. 언제 또 이렇게 ‘시간’에 대해 입체적으로 다가가면서 살펴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질문으로 시작하고 질문으로 이어지는 글들이 많았다. 그런 글 속에 계속해서 나오는 질문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범위로 사색이 이어졌다. 앞서 언급한 “시간이 정말 흐르는 것일까?”라는 질문처럼 말이다. 시간은 정말 흐르는 것일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존재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낯섦을 느껴본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야? 나에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게 너무 당연했는데. 그럼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아니 시간이 존재하는 걸까. 정말로 존재하는 건 무엇일까.






1.


"희망"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조차

적어도 한 가지 시간적인 태도의 중요성은

거부할 수가 없다.


바로 희망 말이다”


- <시간은 환상인가?> 중



뉴필로소퍼 속 <시간은 환상인가?> 글의 마지막 문장이다. 처음에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이해하자마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와, 희망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정말 진짜 맞은 기분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시간은 환상이다. 이 환상에서 벗어나면 영원에 이르게 된다”라는 믿음을 지닌 이들마저 “환상에서 벗어난 영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희망’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반대되는 태도가 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예측이나 상상하며 바라는 것이니 당연하게도 미래라는 것이 우선 가정되어야 품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머리를 맞은 후에는 이 문장에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머물고 있었다. 나에겐 희망을 시간적인 태도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관점 자체가 너무 새롭고 놀라웠다. 사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조차 사람이 감각하는 시간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던 것이었다.


동시에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시간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내가 사람으로서 시간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조차 인식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삶과 너무 깊이, 밀접하게, 아니 어쩌면 반대로 우리가 시간이라는 것에 스며들여 버려서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하지만은 않은 것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시간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이미 읽고 온 지금이라 그런지 같은 문장을 보고 있지만 여러 방식으로 생각이 뻗어 가게 된다.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일어나지도 않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미래를 미리 상상한다는 것은 솔직히 너무 익숙한 말이다.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인식하고 있으니 시간은 흐르는 것이라고 말해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나'는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의 글을 읽은 나로 변해있었고,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래 시간은 그러겠지"라고만 넘겼던 시간에 대한 말들이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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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간다고 말하고 싶은가?

천만에! 슬프게도 시간은 가만히 있고, 우리가 가는 거라네”


- 헨리 오스틴 돕슨



“단순히 시간을 '시간'이라고만 생각한 나”는 “더이상 시간을 단순하게만 바라볼 수 없는 나”로 변했다. 이 변화에는 시간이 흘러서 과거에서 현재로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정말 시간은 흐르지 않고 내가 흘러와서 사람들이 ‘지금’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정말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고, 변화하는 나의 경험과 과정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저 시간이 흘러간 거라고 당연하게 이해해온 것이 아닐까.



Q: 당신의 책에서 눈에 띈 한 구절은 우리가 세상에 접근하는 제한된 경로를 시간이 어떻게 열어주는지를 이야기한 부분이다. (중략) “시간이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지력으로 구성된 두뇌를 지닌 우리 인간이 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형태다. 즉 시간은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다.” 우리의 시간 개념이 기억과 예지력 사이를 오가며 우리가 일관성있고 논리적인 인생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인가? 시간이란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한데 모아주는 접착제인가?


A: 그렇다. 내가 물리학에서 얻은 주된 깨달음 중 하나이자 일반적인 시간의 문제는 바로 물리학에서의 시간 개념과 시계 작동 방식을 우리의 시간 경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는 서로 관련이 있지만 다르다. 우리의 시간 경험은 분명히 시계와 연관되지만, 시계가 직접 포착하는 어떤 대상보다 훨씬 풍부하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흘러가고 지나간다는 감각이 있는데, 우리의 시간 경험은 한순간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뇌는 과거의 흔적이나 시간상 이전에 벌어진 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우리 기억에 담아둔다는 의미에서 어느 한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 실제로 생각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기억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우리를 과거로 데려간다. 또 우리를 미래도 데려가는 것은 미래를 예상하고 상상하고 기대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우리 뇌는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저장된 기억을 이용하는 기계다. 물리적 시간의 긴 흐름 속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기억, 책에서 얻은 기억, 과거를 돌아보고 얻은 기억 등을 통해 시간으로 이어진 찾은 창에 연결되고,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추측을 통해 미래로 연결된다. 이것이 시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다.


- <시간은 각각의 ‘지금’들의 총합이다>, 카를로 로벨리 인터뷰 / 대담: 잔 보그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상호작용의 방식이 될 수 있었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시간에 동일한 조건으로 이미 갇혀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이미 그 아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 속으로 들어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흐름은 시간이 아니라 정말 내가 흘러서 미래라고 부르는 시간 혹은 공간, 혹은 그 어떤 지점에 다다른 것만 같다. 세상에. 사실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조금 많이 놀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내용을 읽으면서 가까이 와닿지 않았는데 지금 나에게 적용하며 다시 생각해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내용이 되었다. 경험하고 수많은 변화라는 사건을 겪고 있는 나를 이런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이런 리뷰를 읽다 보면 “시간에 대해서 굳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떤 효용이 있는 거긴 한 걸까?”라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뭔가가 있긴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당장 다른 방식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내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범위가 더 확장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간"처럼 익숙하지만 잘 생각해보지도 못한 것에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다. 사실 지금 이 리뷰 문단을 쓰고 있는 게 너무 재미있다. 새로운 걸 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리뷰를 쓰는 지금까지도 (뉴필로소퍼를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 즐겁게 리뷰를 쓸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는데) 뉴필로소퍼는 내게 그런 모습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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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 시간을 말한다면, 시간으로 예술을 말한다면. 시간이 예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인 것은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지만, 시간 자체를 주제를 두고 예술을 말하는 글은 아마 처음 만났다. 굉장히 인상 깊었다. 예술에 대한 나의 태도를 시간이라는 거울로 다시 살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로선 한 문장, 문장이 말하는 내용을 인상 깊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예술 자체는 인간의 굴레와도 같은 시간의 지배를 극복하게 해주는 요술 지팡이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으로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인간이 그저 현실만을 사는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 준다. 현실을 살지만 또한 현실 너머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의 공통된 사명은 시간에 대해 성찰하고 인간적 갈망을 계속 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일상을 살아가면서 시간을 성찰하지 않는다. 의미가 남지 않는 한 시간은 망각된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시간은 내 생명의 소진을 뜻한다. 이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에서도 엄연한 사실이다. 때문에 예술가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작품에 메시지를 담는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라. 그래야 허무함을 이긴다."


-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예술>, 나성인

  


전에 내가 쓴 다른 글에서 그런 언급을 했었다. 어쩌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인간과 시대보다도 더 오래 남겨진 것이라고.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몇백 년도 더 된 시간을 품은 예술 작품을 아직까지도 만날 수 있다. 그 작품이 태어난 시대와 그때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작품은 여전히 시간을 거스르며 우리 곁에 남아있다. 무엇보다 작품에는 그 당대의 시간이 사람과 시대라는 것으로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선 작품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을 전혀 다른 시간이 마주할 수 있는 놀라운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때의 시간이 존재했음을, 지금이라는 시간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따라잡으며’ 살았지, 시간에 대해 성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는 인색했다.


시간에서 ‘자꾸’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시간을 자꾸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 숨에 맞게 늘이고 줄이고, 빨리 돌렸다가 천천히 가게 할 줄 알아야 한다.


-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예술>, 나성인



이 부분을 읽고 지난 작품 연재가 떠올랐다. [Untangle]말이다. 이상하게도 완성해야 할 그림보다 그림을 두고 일어나는 시간에 그렇게 집착하고 머무르려던 내가 담겨 있던 거친 글과 작품들. 여전히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왜 그랬을까 생각이 들곤 했는데. 문장을 읽으면서 파편처럼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도망쳐서 그림을 그리는 나, 어쩌면 나만의 방식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었나. 거기서 나는 내가 원하는 속도대로 생각하는 나를 이어갈 수 있었다. 라고 믿고 싶었다. 정해진 단위에서 쫓기는, 그런 틀에 갇혀있는 게 싫었던 걸까. 그렇게 거부하고 도망가고 싶던 틀이란 것에 시간이 포함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시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는걸 보면 말이다. 아, 이 이야기는 쓰지 말고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다. 중요한 지점을 발견한 기분이다.






Epilogue,



“당신의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대답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질문

내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안녕하긴,

늘 그랬던 대로 흘러가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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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뉴필로소퍼 6호의 후기를 요약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시간은 절대적인 것 같은 시계의 단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고 변화하는 세상을 경험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라는 것. 이라는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도 스스로 정해놓은 시간 단위에 대해 어떠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많이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뉴필로소퍼를 읽고 난 후의 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간에 대한 질문을 뒤집어 보는, 이 도서를 읽지 않았으면 상상조차도 못해볼 사색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다른 시선으로 살펴보았을 뿐인데,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 느낌이란 것은 생각보다 거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과 일상을 시간이 흐른다는 믿음에 의지하면서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인간은 당장의 현실인 현재의 시간을 살지만 동시에 다가올 시간들을 내다보며 살고, 또한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 불러와 몇 번이고 반복 재생시키며 산다. 시간에 매여 사는 인간이 시간 바깥을 떠올릴 수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예술>, 나성인



어느 하나 옳다고 할 수 없는 질문들 사이에서 내가 그나마 조금 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온전히 시간에서 벗어난다는 혹은 온전히 시간에만 갇혀있다는 극단적인 끝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시간에 갇혀있지도, 벗어나 있지도 않은 각자만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미술에 대한 생각을 말할 때도 자주 하는 언급인데, 그런 정해진 극단적인 끝이나 경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인간은 다채로운 사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래야 자신만의 생각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은 무조건 흐르는 거야!”가 절대적인 답이라고 확정되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지점 또한 애초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며, 나는 단지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이라는 인식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보는 세상의 범위는 확실히 전보다 더 넓어졌다. 어쩌면 시간이 아니라 내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고, 변화하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틀에서 '나'를 자연스럽게 정리하려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해처럼 말이다. 하지만 뉴필로소퍼를 읽은 후의 나는 여전히 일상을 기존에 알고 있던 시간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존재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시간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만 시간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이번 독서는 두 방식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나’의 사색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저편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나는 시간을 그냥 시간으로만 두고 있지 않을 것만 같아서. 아마 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정말  시간은 무엇일까"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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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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