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도를 기다리며’ : 고도는 오지 않는가? [공연예술]

글 입력 2019.05.1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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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에스트라공, 애칭 고고는 맞지 않는 신발에 대해 50여 년 동안 친구 블라디미르, 애칭 디디에게 말한다.

그는 왜 신발을 바꾸지 않았을까?

[크기변환]고도 포스터 큰거.jpg


 
#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이나 문학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작품이다. 줄거리만 보면 어떤 두 사람이 언제 올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지극히 간결해서 어떻게 이야기가 된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올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이 연극은 (인터미션 15분 제외) 무려 180분 동안 이어지며 그 의문을 폭발시킨다. 흔히 말하는 ‘이야깃거리’, 작품의 소재가 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는 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걸까?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도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극은 이 점을 캐치하여 작가 본인조차 정의하지 않은 무엇-고도를 기다린다.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등장인물과 함께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해석을 입힌다. 누군가에게는 신, 혹은 구원. 어쩌면 삶의 의미, 혹은 죽음. 단순히 보면 극에서 언급하듯 번영과 안정. 고도는 채워지지 않은 언어이자 부재하는 존재이며,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무대 위에 현존한다.

1막의 시작은 디디의 울음이다. 신발이 꽉 껴서 벗겨지지 않아 아픈 디디에게 고고가 다가간다. 허름한 옷차림의 두 사람은 마치 황혼의 노부부처럼 티격태격 사이가 좋다. 주고받는 말이 이치에 맞거나 원활하게 흐르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넘어간다. 그런 두 사람 앞에 채찍을 든 포조와 올가미를 쓴 럭키가 나타난다. 포조는 럭키를 함부로 대하고 럭키는 순응한다. 디디와 고고는 그들과 어울리며 한 때를 보낸다. 포조는 럭키에게 ‘생각’을 시키고 럭키는 잘못 수집된 광고 키워드 마냥 연관 없는 문자들을 토해낸다. 아주 길-게.

두 사람은 떠나고 두 사람은 여전히 고도를 기다린다. 소년이 온다. 고도가 내일 온다고 한다. 디디와 고고는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2막은 더 심심해진 디디와 고고의 만담이 계속된다. 별의별 말과 행동을 하며 시간을 죽인다. 어제처럼 포조와 럭키가 온다. 그런데 포조는 눈이 멀었고 럭키는 목소리를 잃었다. 언제 그랬냐고 묻는 말에, 포조는 화를 내며 ‘어느 때엔가’ 그랬다고 말하며 또한 놀랍게도 디디와 고고를 모른다고 한다. 분명 어제였는데?

날이 저물고 디디는 독백한다.

다시 돌아온 양치기 소년은 어제와 똑같은 말을 한다. 고도가 내일 온다고 한다. 디디는 절망한다. 그럼에도 내일의 고도를 다시 기다리겠다는 디디와 따르는 고고. 그들은 농담 삼아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목을 매자고 말한 뒤 헤어진다.



# 고도는 누구인가 : 부조리극과 실존주의

어쩌면 우리는 속았을지도 모른다. 디디와 고고가 어제와 오늘이라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에 시간선이 하루 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 고도를 기다렸던 무수히 똑같은 날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50년 동안 디디가 구두 얘기를 해온 것처럼 말이다. 변하지 않는 오늘, 반복되는 시간. 이것은 농담처럼 지나갔지만 정말 두 사람이 목을 매어야 끝나는 것일까?

고도는 오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고도는 누구일까?” 우리 관객들의 머릿속뿐만 아니라 디디와 고고의 머리에서도 떠나지 않는 이 말은 부조리극이 막 생겼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수수께끼였다.


부조리극이란?

부조리극의 주제는 불합리 속에서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부조리극은 인간의 고독과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어 인간에게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사회적 위치나 역사와 연관을 지을 수 없는, 환경에서 단절되어 버린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원적 상황과 대결하고 또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절박한 행위나 행위의 부재이다.

대사에서는 언어가 해체되고 등장인물들 간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단순한 몽타주와 천편일률적인 클리셰가 지속될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조리극 [Absurdes Theater]
(드라마사전, 2010., 김광요, 박진권, 황성근, 류용상, 김종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찬양했으나 그 이후로 이어진 두 번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구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모든 게 불분명하고 옳고 그름이 섞이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 때 프랑스 지식인 장 폴 사르트르가 등장하여 시대에 필요한 격언을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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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 세상은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다. 인간 개개인은 이에 맞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부조리에 대한 영원한 (정치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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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서사극 대신 부조리극을 쓰며 실존주의를 받아들였다. 다만 투쟁을 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여 존재와 미래라는 깨진 유리를 긁어모아 모자이크처럼 붙였다. 언어는 어긋나고 이야기는 끊기고 끝은 오지 않는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시대인으로서 그는 인간에 대해 회의를 품었던 것 같다.

고도,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인간에 대해.

정말 고도는 오지 않는 걸까?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나 개인이 이 세상에서 투쟁하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주체의 독립성과 역사의 진보를 일반화해서 말했다. 서양의 관점에서 ‘역사’라는 잣대를 세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나눴다. 맑스의 역사인식을 토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늘 추구해야 하는 것, 이는 곧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반박된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르트르의 개념은 전통적인 폐쇄사회의 특징인 왜소성을 드러낸다. 사르트르가 안이한 대비를 통해서 미개인과 문명인의 구별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설정하는 기본적인 대립을 꽤 난해하지만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레비스트로스는 개인적 삶이든 사회적 생활이든 그 안에서 오랜 시간 변화하지 않는 법칙·원리·틀, ‘구조’에 관심을 가지며 사르트르의 문명과 미개의 이분법을 거부했다.(참고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실존주의는 그렇게 힘을 잃었고 이후 구조주의는 심리학, 사회학, 기호학 등 여러 학문에 방법론으로 쓰이며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인식틀이 되었다.

존재의 불안을 잊고자 아등바등 했던 긴 시간동안, 그래서 고도는 왔던가?

오늘날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무엇을 믿을지 갈팡질팡하다가 일신의 안락과 부, 명예처럼 바로 느낄 수 있는 가치들을 제시하는 명사들이나 책을 척도로 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믿어야 사는 존재니까. 다만 이는 여전히 믿을만한 게 별로 없다는 것을, 기존의 가치들이 설득력을 많이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Outro

고도는 오지 않고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꽉 낀 신발을 벗어던지며.



# 고도는 오지 않는다 : 니체와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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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니체


니체 철학에서는 이처럼 기다림의 주체와 도래하는 주체가 수렴한다. 니체는 '네 자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자, '네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나'를 이중화했다. '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

니체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다림의 문제, 다시 말해 시도와 실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기다려보았는가. 나는 나를 어디까지 시도해보았는가.

- 고병권, 「다이너마이트 니체」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기약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며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는 오지 않으니까. 내가 힘겹게 산을 올라갈 때 비로소 고도를 만난다. 디디와 고고는 잘못된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렸다. 그들의 약속장소는 그 산의 위에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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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세상은 부조리하고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렇다(It is). 그래서, 이것에 순응할 것인가?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이를 영원한 상태로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면 고도를 만날 수 없다. 오늘도 무엇을 할지 갈팡질팡하고 (당연히)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들은 원할 줄 모른다.(They don’t have power to want)

고도를 향해 가는 그는 고도를 만나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는 고도를 만나길 원했고 올라갈 뿐이다.

당신이 미래를 원한다면 미래가 당신에게 올 것이다. 당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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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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