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저 또다른 일상, 몬트리올. [여행]

몬트리올 2
글 입력 2019.05.1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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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에도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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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오후, 볕 좋은 공원에서


처음 도착했을 땐 너무 추워서 언제 날이 풀릴까, 얼른 공원에 나가서 그림 그리고 싶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5월도 삼분의 일이 지나가버렸다. 그동안 가장 중요한 구직활동은 허탕을 쳤는데, 막상 하루하루를 되짚어보면 의미 없이 보낸 날보다는 그래도 무언가 배우고 경험한 날이 많은 것 같다. 그게 당장 내 통장 사정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조급한 마음은 어느정도 달래주는 것 같다. 그래, 이것도 경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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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막 봄이 태동하는 4월 1일에 눈 덮인 겨울의 땅으로 넘어왔다. 이번이 아마도 내 짧은 생에서 가장 길었던 겨울이 아닐까. 벚꽃이 막 피려고 했는데 다시 눈이 내리다니, 내 고향 제천에서는 청풍호 벚꽃축제도 하는데! 평소에는 차 막힌다고 갈 생각도 않던 벚꽃축제까지 아쉬워지는 추위에 웃음이 났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하루 자고 일어나니 나무에 하얀 꽃이 피었다. 멀리서 가지마다 보송보송하게 피어 있는 모양을 보고 추위를 뚫고 피어난 올해의 첫 꽃인 줄 알았는데, 이 얼음꽃도 꽃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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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4월 첫주는 겨울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그렇겠지만, 몬트리올에서 보내게 된 한 해 역시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고 기회이다. 무엇을 얻어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의 나는 분명 지금의 나와 다를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과정을 어디에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나를 못 믿겠다. 100일의 도전은 50일도 채우지 못했고, 블로그도 열심히 쓰겠다 다짐만 몇 년째인지. 일기도 매번 쓰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다. 몬트리올에 도착한지 한 달 하고도 열흘 남짓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일기장에, 또 다른 날은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SNS에, 정돈되지 않은 기록들이 두서없이 널려 있다. 이게 내 성격이라 치고 넘겨야 할지, 아니면 진득하게 어디 한 곳에 정리해두어야 할지.

일 년 후의 나를 예상할 수 없듯 이 기록도 어떻게 마무리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편 한 편 쌓인 뒤에는 읽어보며 추억할 만큼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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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지하철에는 스크린도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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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지하철에는 스크린도어가 없다
 

서울의 지하철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는 조금 생소한 풍경이었다. 돌이켜보면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도 대부분의 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가 없었는데, 그땐 그냥 '프랑스는 원래 이렇구나' 하고 넘겼던 것 같다. 한때 누구보다 혁명적인 나라였지만 이제는 드러나는 변화에 느린 나라니까. 그랬는데, 유럽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더 발전한 캐나다의 지하철 역에 스크린도어가 없으니 그제야 '왜 없는 걸까'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처음 떠올린 건 슬프게도 '지하철 투신자살'이었다. '스크린도어'라는 것이 애초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이니까.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삶을 비관할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이는 캐나다에서는 스크린도어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 그 다음으로 떠오른 건 '안전사고'에 관한 것들이다. 기본적인 안전도 보장 받지 못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던 몇몇 관리 직원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생각났다. 캐나다에는 그런 부당한 일이 없겠지. 떠올리고 보니 죄다 부정적인 일들 뿐이고, 나는 너무나 쉽게 캐나다와 우리나라를 비교하며 불평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문제해결 방식이 잘못된 것 같아, 근본적인 해결은 없고 무조건 덮고 넘기기만 하잖아.

투덜투덜 하면서도 몸은 착실히 지하철을 타고 다운타운으로 이동했다. 프랑스에서 사귄 친구에게 몬트리올에 사는 친구를 소개받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처음 보는 자리이다보니 온갖 다양한 주제가 나왔는데, 그 자리에서 문득 불평처럼 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우리나라 지하철은 대부분 스크린도어가 설치돼 있는데 여긴 그렇지 않아서 신기했어. 그런데 우리나라는 문제 해결 방식이... 그 날 처음 만난 친구 루이스는 내 불평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쩌면 관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장 확실하고 편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랬겠지.' 

그 '그럴 수도 있지'하는 제삼자의 대답은 내게 묘한 깨달음을 주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대한 의견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내게 보이는 대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스스로를 비관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는 것.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수많은 명사들의 강연과 어록들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어느새 나는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 영주권도, 새로운 공부나 시작도, 그 어떤 거창한 목표도 아니라 그저 도피였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동안 손에 쥔 거라곤 자잘한 아르바이트 경력과 문학학사 뿐인 나를 말없이 옥죄어오는 한국 사회로부터 도망친 거다. 우리나라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해, 외국의 자유분방하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가 좋아. 하지만 막상 한국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새로운 도시에 정착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정적인 모습의 한국사회' 안에서 자라나, 사실은 누구보다 내 머릿속 한국사회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 내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자유로운 곳'은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 '자유로운 곳'으로 향하는 티켓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안에서 헤맬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근히 잘 흔들리는 성격이라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 같은 일은 정말 못 하는데, 철저한 제삼자 루이스의 시각을 빌려 보니 조금은 알겠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다양한 환경을 접해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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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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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머무는 4월의 몬트리올 시청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루이스를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에 보이는 몬트리올 시청을 그려보았다. 한선 그리기로 도전했지만 중간에 너댓 번은 끊겼던 그림. 이걸 그릴 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이 그저 설레었다. 그런데 이 날도 벌써 한 달 전이다.

이렇게 보니 새삼 시간은 공평하다. 학교생활을 즐기던 나에게도, 알바 투잡을 뛰며 하루 11시간 일하던 나에게도, 지금 이렇게 몬트리올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 나에게도, 똑같은 24시간이 주어지고 1분 1초가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그 시간이 지나가는 자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렸다는 것마저 공평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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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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