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거짓, 그 표면의 장벽 : 모순이라는 진실 – 전시 "거짓말" [시각예술]

우리를 둘러싼 거짓과 거짓된 속성으로서의 참
글 입력 2019.05.1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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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색감 너무 예쁘다!
그라데이션 알록달록
 



0. 거짓으로 가득 찬 현대사회


 

소위 삭막하다고들 말한다. 아이에서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고,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시작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성인이 되면서—우리는 사람과 부대끼어 살고 있음에도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 때가 좋았어,” “그 시절이 제일 편했다.” 라는 말이 나이가 들수록 입버릇처럼 따라다니는 이유도 이렇듯 삭막한 인간관계가 한 몫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진심을 털어놓을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점점 적어진다. 그래서 쓸쓸하고 막막하다.

 

반대로 내가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상호 간의 이익관계에 기반을 두어, 나의 속내가 아닌 상대가 원하는 말을 내뱉어야 할 상황은 숱하게 증가한다. 인간적인 면에서 내가 상대방을 싫어할 지라도, 공적인 관계로 얽힌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앞에서 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애써 그에게 공감하는 척, 그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척 연기해야 한다. 이는 일부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라면 보편적으로 경험할 정서다. 분명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진실된 관계를 맺고는 있지 않아 보이는 순간을 직면한다.

 

전시 <거짓말>도 이렇듯 거짓이 일상적으로 현존하는 오늘의 사회를 비판한다. 수많은 시대의 문학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삼는 작품들은, 유독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냉소적으로 접근한다.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요구되는 거짓들을 다룬다. 우리는 이 거짓들에 함몰되어 껍데기만 그럴싸한 현대인으로 거듭난다. 전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거짓으로 똘똘 뭉친,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한편 유감스럽게도,

본 문단마저 거짓으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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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진짜’ INTRO : 진실인 모순


    


“전시 <거짓말>은 허구의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전략을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입니다. …… 작가들이 허구, 거짓말을 표현방법으로 택하는 이유는 사실보다 더 간절하게 표현하거나 크게 놀라게 하여 자신의 생각을 깊숙이 전하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는 잘 구성된 허구가 진실보다도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이들의 창의적 ‘거짓말’이 진실에 다가서는 또 하나의 단초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전시 안내문 중에서)


 

우리는 거짓을 논할 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크다. 진실이라는 단어와 정 반대의 관계에 있는 ‘거짓’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직면할 때 우리가 법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죄를 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거짓말은 나쁘다.’ 아주 틀린 문장은 아니다. 진실이 참된 것과 동일시되고 그 참된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규범이나 윤리의 기반을 이루는 데에 필요하다면, 그 진실을 가리는 측면에서 거짓은 나쁘다. 대체로 이러한 의미에서 거짓말이 나쁘다고들 한다. 상대방을 기만할 뿐이라면서, 심각한 경우에는 법으로 처벌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거짓말은 나쁘기만 할까. 관계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면 무조건 상대방을 기만하는 것인가? 착한 거짓말이라는 용례도 있듯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비록 그것이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할 지라도) 그를 배려하는 측면에서 참되지 않은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가정이나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곤경에 처한 친구에게 그 친구가 처한 곤경을 곧이곧대로 상기시키면서 위로하라고 말하진 않는다. 사실 네 상황이 당장 죽을 정도로 나쁜 건 아니잖아,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인걸—설사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경우가 정말 많다.) 이렇게 말한다면 사회성 없냐는 비난만 돌아올 것이다. 그토록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거짓말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왜 있는 그대로 말하면 이처럼 사람들은 화를 내고 납득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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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작품의 일부.


  

전시 <거짓말>은 발상의 전환을 꾀한다. 작가들은 거짓말을 내뱉지 말아야 할 비윤리적인 언어에 국한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수단으로 이용하여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바 혹은 감상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미적 경지에 이르게 한다. 전시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그림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자 단서다. 거짓은 진실과의 모순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진실로 인해 진실에 다가가게 해주는 것이다. 오늘 본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전시회의 작품들은 총 네 개다. 천천히 살펴보며 거짓의 향연으로 떠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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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전시회 작품 중 일부.



 

1. 날개 달린 가방의 허구성

: <그 남자의 가방 Ⅱ>, 안규철 (2014, 종이에 연필)


 

한 컷의 그림과 그림을 설명하는 글들이 하나씩 액자로 나열되어 있을 때, 이 액자들을 보며 예술 작품이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작품을 포함해 내가 소개할 네 작품들은 대체로 이러한 의문을 유발한다. 이들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속성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는 아닌가. 첫 번째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면, 본 작품은 철저히 스토리텔링을 목적으로 삼는다. 여러 액자들로 연결된 이 작품에는 액자마다 그림과 함께 짧은 글들이 적혀 있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적 썼던 그림일기처럼 말이다. 짧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감상자는 미술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글을 읽는다는 기분에 휩싸인다.

 

작품 속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년으로 추정되는 한 남성이다. 매일 그가 하는 일이라곤 방에 틀어박히는 것,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 남자는 오래 전부터 주인공 자신이 보관해 둔 날개가 달린 가방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아직 그 가방을 가지고 있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주인공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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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자신을 불현 듯 찾아와 책임을 추궁하진 않을까, 경찰서에 끌려가 구속되진 않을까, 구속된다면 자신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그의 불안은 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급기야 주인공은 집을 떠나기로 한다. 가방을 들고 멀리 떠나,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그는 집을 떠났다. 가끔 날개 모양을 한 그의 특이한 가방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긴 했지만 어쨌든 ‘도주’라고 스스로가 칭했던 시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리고 점차 그는 깨닫기 시작한다. 사실 그것은 도주가 아니라, 오랜만에 집밖으로 나와 시작한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그 남자가 가방을 찾기 위하여 주인공 본인에게 전화한 것이 맞을 지라도, 어쩌면 자신은 경찰서에 끌려가야 할지 모름에도 그는 도주한 것이 아니었다. 온종일 집안에 쳐박혀만 있던 자신을 집밖으로 이끌어준 여행 가방이었다고, 스스로 되뇐다.

 

그가 20년을 보관하고 있었던 날개 달린 가방은, 과연 진짜 가방이었을까? 그 남자는 정말 자신의 가방을 찾기 위해 주인공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을까? 너무나 많은 세월을 방 안에서 홀로 보낸 주인공을 질책하고자,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자 단지 가방이라는 허구의 존재를 빌려 주인공을 압박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가 날개 모양의 가방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구원의 신을 빌려와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고 굳이 가방이라는 물질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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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구원해 줄, 그러니까 그 작품에 표현되는 천사는 현실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러한 신은 물질적인 면에서 허구지만, 그것으로 하여금 바깥의 빛을 보게 해 준다는 점에서 주인공에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때 감상자에게 지나치게 구원의 존재가 현실에 없다는 점은 명백히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가방이라는 물질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참된 것을 소재로 선택함으로써 문제점을 해결했다. 동시에 날개의 형상에 가깝다는 묘사를 덧붙여 현실의 것인 동시에 현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모순된 속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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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꿀 수 없는 인생에 관한 고찰

: <상자 속으로 사라진 사람>, 안규철 (1998/2004, 드로잉, 상자, 천)


 

역시 안규철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 일기형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와서일까. 하지만 전 작품과의 차이점이 있다. 이번에는 액자들 뿐 아니라 조형 작품도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액자들이 이전의 작품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담지 않고 사용설명서 격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액자형 작품과 함께 전시된 조형 작품은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한 수단이다. 사용설명서를 천천히 읽다보면, 이것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천 끝 부분의 밑으로 들어가 앞으로 천을 끌고 나아가서, 상자 속에 그대로 들어가면 된다. 이후에 자신이 상자 밖으로 나왔을 때 펼쳐졌으면 하는 풍경을 상상하며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염원하면 된다.

 

마지막에, 상자 속에 들어간 예시의 인물은 그 상태로 다른 어딘가로 옮겨지지 않는다. 아니, 그가 상자에 들어가고자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그를 둘러싼 배경은 단지 여백으로 가득했다. 처음부터 공간의 이동이란 없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는 설명부터 거짓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는 것은 박스 안에 들어간 그를 둘러싼 환경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었다. 작가는 사용설명서의 인물이 박스에 들어간 직후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소멸에 이르는 박스를 세 개의 액자에 걸쳐 그려내었다. 박스는 사용자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킬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박스에 들어간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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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전 작품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명백한 거짓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이 가방의 실체를 밝혀서야 그 허구성을 눈치 챌 수 있었던 전 작품과 달리, 본 작품에서는 감상자가 비교적 이 박스의 실체를 한 번에 알아내기가 용이하다. 다른 세계로 이동을 시켜준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훈도 상대적으로 명백하다. 인생을 바꾸어 줄 전능한 존재는 적어도 우리의 현실세계에서는 없다는 사실. 이렇게 전 작품과 달리 거짓이라는 속성을 뚜렷하게 작품에 가미하였기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진실에 선명하게 다가갈 수 있다.

 

본 전시회를 대표하는 두 작품을 꼽으라면 이 작품과 후술할 <관악산호랑이연구소>라는 작품을 꼽을 것이다. 딱 봐도 거짓인 것과, 거짓이 아닌 것 같은 거짓으로 작가 본인의 목적을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전자는 교훈형 작품에 가깝다면, (어디까지나 가깝다고 했다. 교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사실 그 자체라 불릴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류의 깨달음을 우리들은 자주 교훈이라고 칭하기에.) 후자는 그러한 유형의 작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말 그대로 속임 그 자체가 목적이고 진실인 경우에 가깝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다음 작품인 <관악산호랑이연구소>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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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다, 믿음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 <관악산호랑이연구소>, 이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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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간판급 작품이 아닐까 감히 예측해본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나는 이 전시를 보고 정말 관악산에 호랑이가 사는 게 아닐까(...) 동기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결과는 말을 안 해도 예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 동기는 요즘 시험과 과제가 많이 힘드냐고, 삶이 많이 고단하냐며 단 걸 좀 먹어보라고 사다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전시에 꼭 가보라고, 가보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만큼 이 전시는 ‘리얼한’ 거짓이다. 지하로 내려간 순간 펼쳐진 호랑이 연구소의 자태에, 현대의 시각예술이 드디어 허구를 진실처럼 속이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구현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부분적으로 선별해서 이 연구소를 관찰해보겠다. 예술 작품을 감상해보자는 것이다. 잊지 말자, 이 연구소가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바로 눈앞에 연구소 입구가 보인다. 다른 작품과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조망 안에서, 먼저 한 쪽에는 약품 몇 개와 호랑이 목격담을 써 놓은 큰 책상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카메라와 연구 장비를 비롯해서 호랑이와 관련된 신문기사와 사진들이 붙여진 책상이 있다. 그 책상 옆쪽에는 호랑이의 모습을 관찰한 TV도 설치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연구소 내부는 어둡다. 마치 비밀스러운 연구를 진행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어둠이 연구실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 책상 위의 전등이나 비디오 영상, 벽면에 걸린 전등 몇 개가 은밀하게 연구소 내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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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 돋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한 책상을 바라보면, 환한 전등 하나와 함께 설치된 텔레비전 영상이 감상자를 반긴다. 영상 속 인물은 호랑이 목격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랑이가 산에 나왔다며, 얼마나 컸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말해준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방금 말했듯 온갖 사진 자료들과 연구 장비들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처음에는 완전히 속아 넘어간 기분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그 어떤 산에도 호랑이는 없다. 관련된 연구를 진행한다 한들 살아있는 호랑이 개체가 없는 상황에서 유의미한 효용을 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호랑이 연구소는 마치 호랑이가 아직까지 산에 당연히 남아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호랑이를 봤다니까요, 호랑이가 있어요. 연구해야 합니다, 연구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들이 연구소에서 그 형태가 말이 되었건, 문서 형태로서의 언어가 되었든 간에 계속 나타난다.

 

철학과의 모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히는 수업시간에 인용하신 학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 학자가 누군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무엇이든 그것이 사실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믿어야 한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면 왜 굳이 그걸 믿으면서까지 수용하고자 하겠는가, 이것이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었다. 그때 수업을 함께 들었던 철학과 친구와 함께 너무 재밌다고 카카오톡으로 깔깔댔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교수님이 예언을 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믿음 그 자체로 구성되었다. 믿어야 현존하는 연구소인 것이다. 그것이 거짓된 믿음일지라도, 적어도 연구실을 돌아다니는 순간만큼은 호랑이가 관악산에 살고 있다고 믿어야 또 다른 세계로서 정당화된다. 작가는 거짓이 거짓이라는 것만큼은 진실이며 동시에 거짓 속에서 믿음을 구현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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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번외, 또 다른 세계

: <메이드 인 안타티카-남극 예술활동 연구 보고서>

이병수 (2014, B5 크기 보고서 설치)


 

철조망 건너편에 연이어 이병수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직전 작품이 배경으로 삼았던 장소가 관악산이라면, 이번에는 남극이다. 남극에서 무엇을 하며 보고서를 썼나 하니, 기가 막히게도 그 내용이 ‘예술 활동’이다. 극지에서 예술가들의 예술 활동을 돕겠다는 취지로, 과학과 예술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라 짐작된다. 실제로 연구 보고서 내용에 그렇게 쓰여 있다. 보고서를 읽다 보면 누구나 헛웃음을 내뱉을 거다. 대체 과학 연구를 어떻게 예술적 방법론으로 접근하여 고찰, 탐구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예술의 사회적 효용을 어떻게 창출하겠다는 것인가? 심지어 남극이라는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고서라는 문서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는 진실이나, 보고서에 직시된 내용들은 거짓으로 가득하다. 보다 엄격히 말하자면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상에 불과한 거짓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서가 진열된 책상에서 시선을 돌려 벽면 쪽의 영상으로 향하면, 우리는 호랑이 연구소의 내부를 관찰할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영상 속의 인물들은 진지하게 남극에 가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다. 남극의 야생동물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시뮬레이션 형식으로 찍어놓은 영상이 정말 압권이다. 그리고 남극에서의 연구를 미리 한국의 연구실에서 양동이 비슷한 걸 쓰고 마치 ‘남극에 있는 것처럼’ 기분만 낸 상황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도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미묘하게 마음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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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식으로 등재된 건 아니겠지...?

  


어쩌면 이 사람들이 진짜 남극에서 예술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갖게 만든다. 관악산에 호랑이가 진짜로 살고 있는 게 아닐지 잠시나마 의심해보는 것처럼. 이병수 작가의 작품들은 허구로 구현한 또 다른 세계를 우리 앞에 선보인다. 믿음에 토대를 둔 거짓의 가상 세계, 하지만 가상 세계라는 말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그것이 가상에 불과함을 동시에 직시하는 감상자의 모습. 작가는 모순의 경계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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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Outro (이건 진실이다.)


 

전시 작품들 중에 극히 일부를 몇 개 살펴보았다. 감상자가 작품으로부터 경험하는 미적인 상태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작품들의 공통점—‘거짓됨’이라는 속성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처럼 삐딱하게만 쓰이진 않는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 전시에서 이 속성은 앞서 말했듯 수단으로 사용된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목표의 내용도 저마다 다르다. 내가 0번에서 ‘가짜’ 인트로를 작성한 이유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거짓됨과 관련된 가벼운 사례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 목적일수도, 단순히 유희가 목적일수도, 혹은 야심찬 서사를 전달함이 목적이 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거짓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극심한 배척을 받을 이유도, 그러한 선입견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비록 누군가는 여전히 거짓말과 반골의 기질을 엮어서 이해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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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러 식당 가는 길에.


p.s

항상 좋은 글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철학과 김 모 군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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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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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  
  • Anonymous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에디터님!^^ 가짜 인트로를 쓰신 부분이 정말로 인상깊었네요. 거짓이 오히려 진실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내용이 아니라 글의 형식으로도 보여주신 시도가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언제 한 번 꼭 시간내서 전시를 한 번 가봐야겠네요. 특히 그 남자의 가방이나 관악산 호랑이 연구소 같은 작품들은 직접 봤을 때 느낌이 정말 궁금합니다. 항상 저는 전시를 갔다와서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느낌을 정돈된 형태로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는데, 에디터님 글을 볼 때마다 정말 잘 하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더 좋은 글들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 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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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Y2eon
    • 2019.05.20 21:08:33
    • |
    • 신고
    • Anonymous좋은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 글을 쓴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 같습니다. 하지만 그 힘든 순간에도 Anonymous님처럼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그래도 그럭저럭 저만의 사색을 담아 글을 완성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정말 따뜻해졌습니다. Anonymous님과 좋은 사색을 공유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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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까쯐
    • '믿어야 또 다른 세계로서 정당화된다.'라는 관점과 생각들이 너무 흥미로워요. 진실보다 더 진실같은 거짓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에디터님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어서 너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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