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 단편소설집

제40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글 입력 2019.05.16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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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적어둔 대사는
도서 <컬렉티드 스토리즈>에서 가져왔습니다.


1.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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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기 전, ‘체계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스승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아직 루스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인 건지 제자 리사보다는 스승 루스에게 마음을 더 기울이게 됐다. 연극을 통해 내가 수행해본 역할(제자)이나 또래 집단(20대)의 특성을 가지지 않은 인물을 헤아려 보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루스는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줄 아는 쿨한 어른이었다.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볼 줄도 아는 호기심 넘치는 사람이고, 미숙한 행동으로 결례를 반복하는 제자에게 재치 있게 피드백하고 동시에 본인의 영역을 슬그머니 양보할 줄도 아는 배려심 있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권위를 툭 편하게 내려놓을 줄도 알고, 약하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드러낼 줄 아는 인간미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갈등을 겪으며 무너지는 모습이 훤히 보였으나 그 상황을 오롯이 대면하여 견뎌내고 있는 것 자체가 루스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증거 같았다.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순간에 맞서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루스에 대해서는 그저 가늠만 해보는 게 나의 최선이라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 다만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관객의 말이 기억에 남아있다. “본인(루스)도 저렇게 해봤을 거야. 그러면서 컸겠지.” 그분이 루스와 비슷한 연배일 거라고 나는 어림짐작해보았다. 흘러가는 말처럼 넘겨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짧은 말 한 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속에서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한숨을 퍽퍽 내쉬는 나와는 달리, 어딘가 무심하게 툭 말을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극이 끝나갈수록 쇠약해지며 몸이 곱은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루스. 그와 반대로 당당히 어깨를 펴고 우뚝 선 리사. 두 사람의 모습에서 루스의 초라함이 더욱 강조되는 것처럼 보았다. 그 초라함은 잠깐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초라함 너머에는 오히려 단단하게 자리 잡은 강인함을 느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오히려 루스가 대단한 어른 같다고 느끼는 것은 어린놈의 결례일지도 관찰자의 오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친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루스가 가만히 넋을 놓은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너무나도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노 이후에 이어진 체념적인 모습의 이면에는 초연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체념과 초연함이 서로 바싹 맞붙어 있는 것이다.



2. 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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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균형을 잡아서 생각해보려 해도 리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예술가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 주장해도, 가까운 관계에서 신뢰를 잃었고 동료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이 점을 정확히 짚은 루스는 리사에게 본인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고 현명한 대처 방안까지도 명확히 제시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리사는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리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루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제자를 앞에 두고 격노한다.

당사자의 명확한 의사를 배제한 채로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리게 한다는 것은 현대판 고문이나 다름없지 않나. 끔찍한 일이다. ‘우디 앨런-순이 스캔들’ 논쟁에서 리사는 예술성과 도덕성을 연결 지었고, 우디 앨런에 대해 그가 ‘우리 시대의 위대한 도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대의 양심이다’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우디 앨런-순이 논쟁에서 리사의 주장과 연극 후반부 갈등 상황에서의 리사를 동시에 떠올리면, 그 사람의 신념이 행동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행동이 신념을 결정한다는 말에 믿음을 얹게 된다.

차라리 리사가 ‘속물적인 마음이 있었기에 스스로 선택을 했다고, 장편에 대한 욕심과 나만의 이야기를 넘어선 소재가 너무나도 절실해서 스승님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능동적 태도를 취했더라면 뻔뻔하고 기가 차더라도 그가 덜 미웠을 것이다. 본인을 탓하라고 스스로 판을 깔고, 본인의 선택에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는 굳건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더 예술가 같았을 것이다.

‘이야기가 나를 잡고 안 놔줬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가져다 대는 주요한 근거가 기가 찰 정도로 피동적이다. 리사는 이 갈등 상황의 원인에 있어 근본적으로 자신의 자율적인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한다.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을 외부로 돌리고 있다. 책임 소재가 외부에 있으니 자기 자신은 결백하다. 루스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아닌 리사의 행동에 상처받았다는데도 수용하지 않는다. 스승의 마음을 깊이 찢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기에 그럴싸한 이유들을 덕지덕지 가져다 붙이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리사만의 세상에서는 리사 스스로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리사의 세상에서나 그렇지, 리사라는 사람의 경계 밖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면 리사의 주장과 근거는 결국 아집일 뿐이다.

리사는 루스의 개인사를 가져다 쓰기로 선택한 그 순간부터, 즉 본인이 루스의 이야기를 잡고 놔주지 않은 순간부터 루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자청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방식으로 루스와 리사가 갈라서게 되는 것은 그녀가 루스와 분리되는 동시에 루스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 아래에 갇히게 될 거라는 사실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끝끝내 루스의 이야기를 끌어 온 장편 소설을 출간해낸 순간부터 루스가 말했던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하는 삶’의 문제들은 리사에게도 이미 예정된 미래가 되었다.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언제나 새겨지듯이 아프게 남는다.


리사 「그, 제가 말했던 버나드 대학 학부 학생이요, 결국은 절 붙잡고는 너무 만나고 싶어서 잠을 설쳤다는 거예요? 전 평생 쫓아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누가 절 쫓아오는 상황이 됐다는 게 정말 이상했어요. 그런데 걔, 사실 제 얘기에는 관심이 없고요, 저한테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거더라고요!」

<컬렉티드 스토리즈>, 96p


리사 「제가 선생님 자리에 있다면요, 만약 ‘제’ 인생이 ‘제’ 제자가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주었다면요, 전 감사할 거 같아요.」
루스 「그래?」
리사 「명예롭게 생각할 거예요. 이렇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컬렉티드 스토리즈>, 114p


2막 후반부의 이 장면들에서 ‘리사가 언젠가 루스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났다. 리사를 만나고 싶어 잠을 설치고 쫓아온 누군가는 루스를 처음 만난 리사와 겹쳐 보였다. 훗날 리사는 언젠가 이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릴 즈음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설령 다시 떠올린 기억에 루스를 다시 찾아 과거의 일을 논하고 싶다고 해도, 이미 한참 늦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스승이 되어 있을 리사는 이 관계의 마지막 퍼즐을, 혹은 가장 중요한 퍼즐을 드디어 맞춰 넣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사를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사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만 같아서. (사실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싶다. 리사도 알게 될 거라고…….) 성찰할 줄 아는 내면의 여유가 있다면 언젠가는 자신이 취한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한 것인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잔인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지나야 깨닫기도 하고,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끔찍하게 속이 썩고, 그래서 더 뼈저리게 배우기도 한다. 그때 스승 루스와 갈등했던 기억에서 새로운 배움의 출발점을 찍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사는 루스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만큼 괴로워하며 이자 붙은 자책감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3. 마치며 열어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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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상략) 그 엄마와 딸 사이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에밀리는 성장하고 마사는 늙어가고… 그런데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발전이 있다거나 갈등이 해소된다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이게 뭐야 싶은 거죠.」

루스 「하지만 그게 인생이야, 안 그래? 어떤 관계가 진실로 해결을 보니? 사람들은, 꽤 괜찮은 사람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나쁜 행동을 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죽어. 그런 일들이 일어나. (하략)」

<컬렉티드 스토리즈>, 82p


연극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모순’, ‘자가당착’이라는 단어들을 떠올렸다. 각각 인물들의 삶은 그럴싸하게 논리적으로 흘러가지만 어느 순간 숭숭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 사이로 인물들이 세워둔 문장이 이리저리 서로 엉겨 붙으며 애매하게 꼬여버린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았고, 두 사람이 당최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답답한 불편함을 가지고 감상하게 만드는 것이 연극 <단편소설집>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인물들부터가 일관적이지 않으니 관객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일관적이지 않고 늘 변하는 데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게 되는 특징이기에 일상적인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흔할 일일 것이다. 더하여 현실은 연극보다 더 복잡하기 마련이니, 연극에서보다 현실 속에서 그 모순은 더 복잡한 양상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단호하게 확정하는 것 같은 온점 대신, 좀 더 머뭇거리면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같은 ‘말 줄임표 상태’를 유지하기, 글의 결론을 열어둔 채 남겨두기……. 이번 글을 쓰며 목표로 삼았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연극이라는 것을, 쓰는 내내 실감했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가 정말 쉽지가 않다. 이 희곡의 서문과 소설 <모순>의 문장을 남겨두며 글을 마친다. 내가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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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티드 스토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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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심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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